서울특별시 서대문구(홍지문 부근)에는 고려 때의 불교걸작인 보도각 마애보살좌상이 있습니다. 정작 조선말 민비(명성황후)의 명으로 승려 정관이 세웠다는 옥천암 보다는 거대한 바위에 보살을 새기고, 하얗게 칠을 한 마애보살좌상이 더 유명합니다.
이 고려후기의 마애보살좌상은 처음에는 백불, 보도각 백불, 백의관음상, 옥천암 마애좌상등으로 불리었지만, 2014년에 최종적으로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이다. 불암 또는'보도각 백불'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미터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코·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 삼각산옥천암의 일주문앞입니다만, 마애보살좌상을 가깝게 보기는 어려워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 보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마애보살좌상앞에는 대형 차양막이 있어서 가깝게 친견하기는 어려워서 멀리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 지역N문화에서 옥천암의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며 보면,
이 마애보살좌상의 크기를 보면, 높이가 4.83m, 무릎 폭 344㎝이며,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우선 15세기 후반에 활약한 대학자 성현(成俔,1439-1504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장의사 앞 시내…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巖)에 불상을 새겼다”라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15세기 후반 경에는 이미 마애보살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8세기 이후 불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불상이 새겨진 바위라는 의미의 ‘불암(佛巖)’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의 기록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이후의 기록인 『동국여도(東國輿圖)』, 『한경식략(漢京識略)』, 『청우일록(靑又日錄)』(1881년 4월 19일자),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1914년 간행),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등에 마애보살상과 함께 보도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18세기 후반부터 옥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9세기 이후로는 ‘해수관음(海水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또는 ‘백불(白佛)’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8년(고종 5)에는 명성황후가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옥천암에서 기도를 하며 호분을 발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 [자료:e뮤지엄, 석남송석하] 보도각백불(普度閣白佛)_북한산 옥천암, 1959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합니다
▼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전해지는 보도각(普渡閣)의 글씨입니다.
[자료:Samuel Austin Moffett Photos-1957-1958 - 백불]
▼ 서울에 주둔 중인 미군이 찍은 사진입니다.(1957~1958 추정)
▼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물이 넘칠 것을 대비해서 차수막 겸 담장을 치고, 아무런 장식이나, 차양막이 없이 온전한 모습의 하얀 칠에 금빛의 장식이 달인 관모와 , 백호, 목걸이, 팔찌등으로 치장을 하였습니다.
옛 기록들을 보면, 간혹 석불에 분칠을 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도 고려시대부터 하얀 분칠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멀리서 당겨보는 마애석불인데, 옛 사진과는 달리 닫집처럼 장식을 달아서 마애보살의 얼굴 부분이 가려집니다. 또한 관모의 장식, 귀걸이등은 금빛이나 아니라 주황색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자료: Samuel Austin Moffett Photos-1957-1958 ] 대한제국 시기에 찍은 사진이지만, 관모는 고려시대의 관모처럼 보이고, 각종 문양으로 아름답게 치장을 하였습니다.
▼ 멀리서 바라보는 옥천암과 보도각입니다. 홍제천의 바닥을 긇어 냈는지, 자갈들과 모래들이 쌓여있지 않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으로 보면, 냇물이 보도각 바로 아래에까지 흘렸습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모래와 자갈들 때문에 냇가의 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도 보도각 앞에 닫집처럼 가람막 장식이 있었습니다
▼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옥천암 스님들이 걱정이 많았겠습니다. 하천에 자갈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하천기능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 재미있는 사진인데, 일제강점기때로 추정하는데, 다리가 없어서 징검다리로 건너다닌것으로 보입니다. 인력거가 손님을 모시러 냇물을 건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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