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독립공원은 독립문, 독립관, 서대문형무소등, 민족의 자주독립과,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 순국하신 독립투사의 넋이 서려 있는 땅에 후손들에게 기억의 장소로 만들어져 1992년 8월 15일에 개원하였으며, 2007년 4월 16일부터 독립공원 재조성 사업을 시작하여 2009년 10월 28일에 재개장하였습니다

 

※ 사진자료는 e뮤지엄, 서울시, 서울시역사박물관, 서대문구청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서대문독립공원입니다

 

▼ 이 독립문은 영은문보다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어찌 보면, 청나라의 속국에서 주권이 있는 국가로서의 선언을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독립문의 건축을 추진하던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황실, 그 뒤에서 알게 모르게 뒤를 봐주던 일부 친일파의 성금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봐야 하는데, 친일민족반역자인 이완용이가 독립협회 창립회원이며, 초대 위원장이었습니다.

 

독립협회의 이완용을 포함한 여러사람들은 민족반역의 길을 걸으면서, 본인은 물론, 아들 손자에게 까지 권력과 부를 남겨 주었으며, 친일민족반역행위가 자랑스럽다고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으니, 우리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글로벌한 지금 시대에, 친일파, 친미파, 친유럽파 등등은 국가의 경쟁력과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꼭 필요합니다만,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과는 분리하여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이나 지난일인데, 왜 들먹거리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학교에서 역사교육 교사들을 전부 해임하고 역사교육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뭐~~~ 가정교육이 안된 사람들입니다

 

하기는 뭐~~~ 황족들까지 나라를 팔아 먹고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 일에 밤낮이 없었고, 친일밀정들은 독립투쟁가들의 정보를 일제경찰에 넘기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니, 조선(대한제국)은 안 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 [자료:서울시] 지금의 독립문은 원래의 위치에서 약 70미터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자리 잡았습니다. 독립문이 원래는 대로의 가운데에 있었는데,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교통량과, 지하철이 지나야 할 자리였으므로, 영은문과 함께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옮겼는지 아리송 하지만, 그 때는 개발속도전의 시대여서, 문화재보다는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과, 국민은 문화재를 아끼고, 우리가 가진 문화, 문화재등에 매우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원래의 독립문 자리 땅속에 독립문이 있었다는 표시로 동판을 설치하여 영원토록 기억하고자 하였습니다

▼ [자료: 독립문(1896)-The Moffett Korea Collection] 독립문 완공 직후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이며, 인왕산의 헐벗은 모습을 보면 그 당시의 조선의 사정을 알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의 강산이 숲으로 만들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토지개발제한구역 일명 그린벨트를 전 박정희대통령에 건의한 어느 수석비서관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연료나, 난방을 석탄, 가스등으로 다변화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 독립문의 건축은 고종의 허락하에, 서재필박사에 의해 추진되었고, 왕실의 하사금과 독립협회 성금으로 건축자금을 모았으며, 사바틴(러시아인)에 의해 설계되고,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높이는 14.2m, 너비는 11.48m입니다

 

처음에는 청국에서의 독립문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영은문과 독립문의 간격이 매우 넒었는데,  1970년의 사진을 보면 거리가 매우 가깝게 보이는 사진도 있습니다

 

▼ 서울은 12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천지개벽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 영은문은 그렇다 쳐도 독립문을 옮기는 일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화강암 하나하나에 표식을 하여, 그대로 다시 쌓는다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북쪽에서 들어오려면 저멀리 보이는 무악재를 넘어야 하는데,  서재필박사는 의도적으로 영은문을 뒤에서 막아버리고 눌러 버리는 것처럼 독립문을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국의 강대국에 둘러쌓인, 이 땅은 불행(?)하게도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항상 힘에 의한 침략에 시달렸으며, 우리의 힘이 약할 때는 항상 그랬습니다.

 

이제는 그만 당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슴도치처럼, 전기뱀장어처럼 우리를 건드리면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 앞에서 봤을때 한글로 독립문에 좌, 우로는 태극문양을 새겼습니다. 내부에서 녹물이 나오는데, 이전할 때 철근으로 시공으로 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1928년에 조선총독부는 독립문의 보강공사를 하였는데, 이때 철근 콘크리트 공법이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1979년에도 이전 공사를 할 때,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 사진은 1915년~1920년 사이에 찍은 사진인데, 대한제국에서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유럽, 미국, 일본등의 여행사진사, 선교사등에 의해 수많은 사진이 발행되었던 그 당시의 포토죤(명소)이었습니다

 

▼ 헤르만산더가 고용한 일본인 사진사가 1906년~1907년 사이에 찍은 사진입니다. 헤르만 산더는 일본주재 독일대사관 무관으로서, 러.일전쟁 이후에 정보수집 목적으로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1906년과 1907년에 여행하면서 사진을 많이 남기었으며, 그 후손들이 사진자료들을 대한민국에 기증하였습니다.

 

▼ 서재필박사는 독립문을 세우면서 영은문의 누각을 헐어버리고, 두개의 지주만을 남겨 두었는데, 청나라는 자신들의 사신들을 맞아 주던 영은문이 무참하게 헐려도 찍 소리도 못했는데, 청일전쟁 때 일본에게 개박살이 난 직후였거든요!!!

 

 사실 그 시기에 일본제국주의는 뭐~ 뵈는게 없을 정도였는데, 뒤에는 든든한 빽이 있었거든요... 미국, 영국 등은 일본이 청국,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외교적으로나, 무기 등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미국이나,유럽의 강대국들의 중국, 러시아에 대한 대외정책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독립문이 완공되기 전인 1896년에 지주만 남기고 누각은 헐렸습니다. 독립문과 영은문이 성산대로 확장으로 옮겨질 때에는 독립문과 영은문의 거리가 별로 없이 가깝게 붙어서 복원되었습니다.

 

▼ 영은문은 처음 세종때에는 홍살문이었다가, 중종 32년에 영조문(迎詔門)이라고 하였다는데, 아마 이때 돌기둥으로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영은문(迎恩門)으로 고친것은 1539년(중종 34) 명나라 사신(설정총)이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이름이 마땅치 않다고 하며,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인 1606년(선조39)에 영은문을 재건한 뒤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조선 때에는 연주문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일개 사신이 조선국왕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치욕적인 시대였으며, 그런시대는 몇백 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돌기둥 지주에다 어마무시하게 높은 누각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에 대한 최고의 환영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악재에서 내려오는 길에 영은문 편액이 잘 보이게 걸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은문 현판입니다

 

▼ 대한제국 시기에 찍은 영은문입니다. 편액을 잘 보면 무악재에서 오는길 앞에서 보이게 걸었습니다. 사신들이 잘 보이게...

 

▼ 영은문의 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뒤에서 독립문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 뒤에서 보면, 독립문의 편액(扁額)이 한문으로 되어 있고, 조선황실의 배꽃문양이 홍예의 중앙에 박혀 있습니다

 

▼ 문위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숨겨져 있습니다.

 

▼ 독립문에서 위쪽으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독립공원 중간즈음에 서재필박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 독립관의 편액을 걸고 있는 원래의 모화관이며, 서재필박사에 의해 모화관에서 독립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96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350미터 지점에 복원하였습니다.

 

▼ 1920년대로 추정되는 유리건판사진에서 보면 기와 단층건물인 독립관(모화관)이 그 앞에 독립문이 보입니다.

 

▼ 독립문이 영은문 주초석앞에서 버티고 있고 저 멀리 독립관이 보입니다.

 

▼ [자료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10년 전후로 찍은 독립관의 사진이며, 설명에는 오른쪽 건물이 일진회 강연장이었다고 합니다.

 

독립문에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군요!!!

 

▼ 독립관은 독립유공자의 추모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 독립관 옆에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의도는 좋은데 유관순열사의 동상이 있기에는 시대적 배경이 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 3.1 독립선언 기념탑과 서대문형모소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1979년의 주역들의 동판입니다

 

▼ 3.1 독립선언기념탑을 둘러보겠습니다.

 

▼ 3.1 독립선언기념탑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 독립에 힘쓰신 분들의 족적을 동판으로 남기었습니다

 

▼ 독립선언서를 오석(烏石)에 새겼습니다.

 

3·1 독립선언서

 

1.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올바른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한다.

 

2.(우리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모아 우리의 독립을 널리 퍼뜨려 알리는 것이고,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며, 전 인류가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는 세계 개조의 큰 뜻을 따르고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독립을 주창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며 전 인류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권리를 얻기 위한 정당한 주장이자 활동이므로,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독립을 막지 못할 것이다.

 

3.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나라를 빼앗겨 오천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자유를 억압당하는 고통을 겪은 지 오늘로써 십 년을 넘어섰다.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긴 지 몇 년이며, 정신 발전의 장애를 입은 것이 얼마나 크며, 민족적 권위와 명예가 훼손당한 것은 또 얼마나 막심하며, 우리의 지식과 재능, 독창적인 발상으로 인류 문화의 큰 발전에 이바지하고 도울 기회를 얼마나 많이 놓쳤는가.

 

4.오호라, 예로부터 쌓인 억울함을 호소하려면,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위신과 도의가 눌리어 쪼그라들고 힘없이 사그라진 것을 다시 살리고 키우려면, 저마다 자신의 인격을 올바르게 발달시키려면, 불쌍한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우리의 후손들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가장 긴급한 임무가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것이다.

 

이천만이 모두 마음속에 날카로운 칼을 품고, 인류 공통의 가치와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얻고자 하면 어떤 강적인들 물리치지 못할 것이며, 물러서서 계획을 세우면 어떤 뜻인들 펴지 못하겠는가!

 

5.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이래 수시로 양국 간의 굳은 약속을 저버렸다고 해서 일본의 신의 없음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일본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생활에서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터전을 식민지로 삼고, 우리 문화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취급하여, 단지 정복자의 즐거움을 누릴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래고 영원한 사회 기틀과 뛰어난 민족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옳지 못함을 책망하지 않겠다. 자신을 탓하고 격려하기에 다급한 우리는 남을 원망할 수 없다. 현재를 돌보기에 바쁜 우리는 예로부터의 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다. 오늘 우리가 할일은 오로지 우리 자신을 다시 세우는 것이지 결코 남을 헐뜯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우리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지 절대로 해묵은 원한과 일시적인 감정으로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공명을 세우고자 했던 일본인 위정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지금의 그릇된 현실을 고치고 바로잡아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지배하지 않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겨레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닌 양국 병합의 결과가, 근본적인 대책 없는 억압과 차별에서 오는 불평등과 (사회 발전에 대한) 거짓된 통계숫자 때문에 이해가 엇갈린 두 민족 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도랑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라. 용감하고 과감하게 예전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친하게 지내는 새 시대를 여는 것이 서로 화를 멀리하고 행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울분과 원한이 겹겹이 쌓인 이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결코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방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를 갈수록 깊게 하여, 동양 전체가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가 조선 독립을 선포하는 까닭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안전을 지켜나갈 무거운 책임을 통감케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의 중요한 요소로서 동양 평화를 실현하여 전 인류의 복지에 반드시 있어야 할 단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졸렬한 감정상의 문제이겠느냐.

 

6.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온다.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로운 문명의 찬란한 빛을 인류 역사에 던지기 시작한다.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한다.

 

찬바람과 꽁꽁 언 얼음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지난 시대의 불길한 기운이었다면, 온화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 다가올 시대의 상서로운 기운이니, 하늘과 땅에 새 생명이 되살아나는 이때에 세계 변화의 도도한 물결에 올라 탄 우리에게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그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가 넉넉히 지닌 독창적 능력을 발휘하여 봄기운이 가득한 온 누리에 조선 민족의 우수함을 꽃피우리라.

 

7.그래서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니, 남녀노소 구별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룩할 것이다.

 

천만년을 이어오는 조상들의 넋이 우리를 안으로 지키고,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니,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곧 성공을 이룰 것이다. 오로지 저 앞의 빛을 따라 힘차게 전진할 따름이다.

 

공약삼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의·인도·생존·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당당하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 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http://kkum.prkorea.com/proclamation)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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