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치소(구, 서대문형무소)가 의왕으로 이전한 자리에 역사관을 지어서, 독립투사와 민주화에 몸 바친 분들의 자취를 알아보았습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그 힘든 감방생활을 하시거나, 사형을 당하신 분들의 기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납니다.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이 분들은 왜 독립투쟁을 한 것일까요?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친일민족반역자와 똑같이 아무 거리낌없이 일본을 대변하는 정치인 집단들을 보면서, 참으로 쓴 웃음밖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걸까요?, 자식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런분들은 이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좀 느끼고 살기를 바랍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98년 11월에 개관하였습니다.

※ 입장료는 성인 3000원이며, 여러 조건의 활인, 무료입장등이 있습니다.

※ 자료사진은 서울시청, 서대문구청, 위키백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역사관의 담벽은 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된 후에 헐리었으나, 역사관으로 만들면서 일부는 다시 벽돌로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는 벽돌 위에 흰색 페인트칠이었습니다.

 

▼ 서대문의 경성감옥에서 마포 공덕동으로 이전한 경성감옥

 

▼ 1930~1940년대로 추정되는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이며, 왼쪽 끝에 구치감이 증축되기 전의 사진입니다.

 

▼ [자료:마포구청] 의왕의 서울구치로서 이전하기 직전인 1987년도의 서울구치소 전체의 사진입니다

▼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한뒤의 모습으로 중앙의 관리동과 옥사 외에는 좌, 우의 건물들과 담장은 전부 헐었습니다

 

▼ 역사관의 정문입니다.

 

아주 오래된 치욕적인 역사이지만, 미래에는 이 아이들이 더 좋은 나라를 만들겠지요?

 

아이가 칭얼대도, 엄마는 다정하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셨습니다

 

▼ 서대문형무소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파란색의 건물만 복원이 되었으며. 오른쪽은 주차장입니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건물들의 명칭을 보기쉽게 안내하는 안내도이며, 화장실은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 원래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입니다.

 

▼ 서대문형무소 담장에 붙어 있는 안내문으로 이모저모를 알아보겠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시작은 원래부터 있었던 경성감옥에서 시작됩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에는 주로 독립투사들의 고문, 투옥등에 이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로 명칭을 변경하여, 주로 사상범, 강력범들에 대한 구금, 투옥등에 이용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제2의 군사독재시대에 저항하는 학생, 종교계, 학계, 일반시민등의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구금하는 악명 높은 교도소였으니, 일제강점기나, 해방후나, 독재정권을 떠 받치는 한축의 국가기관이었습니다.

 

▼ [자료:서대문구청] 1940년대(추정)의 서대문형무소입니다

 

▼ 일제가 건설한 근대의 첨단감옥인 서대문형무소의 1945년의 모습입니다. 사진의 하단에 기다랗게 생긴 2층 건물들은 미결수들을 구금하는 구치감입니다. 대개 독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금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담장에 붙어 있는 독립투쟁으로 수감되었던 분들의 수형카드의 일부 모습입니다.

 

▼ 친일민족반역자, 조선총독부의 총독등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가 투옥, 사형되었던 분들의 일부 사진입니다.

 

▼ 정문에서 들어와서 보는 모습으로 정면의 옥사는 여자옥사이며, 유관순열사가 투옥되었던 옥사입니다. 오른쪽은 전시관이며, 역사관의 행정업무를 보는 사무실도 있습니다

 

▼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을 연도별로 보여줍니다.

 

▼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문서입니다.

 

국가 간에 상호 간에 합의하여 체결한 약속은 조약(條約)이라고 하지만, 한쪽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체결한 약속은 늑약(勒約)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강제병합을 위한 조건으로 강대국들의 양해가 필요하였으므로,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에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으므로, 남은 것은 조선조정의 도장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만, 이미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친일민족반역자들은 앞 다투어 늑약에 서명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막대한 돈과 토지를 챙겼습니다.

 

※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을사늑약은 조선을 대표하여 박제순과, 일본을 대표한 일본특명전권공사가 합의 하였는데, 5개 항의 내용이 있어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 을사오적이라고 하는 대표적인 친일민족반역자들의 사진이 대표적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오적(五敵)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적극적으로 을사늑약에 힘을 보탠 역적들도 많을 것입니다.

 

▼  [자료] 기해각서(己酉覺書 ]란?

 1909년 7월 12일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사이에 교환된 것인데, 모두 5개 조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사법과 감옥사무는 완비되었다고 인정되기까지 일본정부에 위탁한다.
2. 정부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일본인ㆍ한국인을 재한국일본재판소 및 감옥관리로 임용한다.
3. 재한국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외에도 한국인에 대하여 한국법을 적용한다.
4. 한국지방관청 및 공사(公使)는 각각 그 직무에 따라 사법ㆍ감옥사무에 있어서는 재한국 일본 당해 관청의 지휘, 명령을 받고 또는 이를 보조한다.
5 일본정부는 한국사법 및 감옥에 관한 일체경비를 부담한다.

 

기해각서(己酉覺書 ]는, 1907년 한일신협약의 부대각서(附帶覺書)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조인된 사법권의 위임에 관한 협약. 우리나라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이다.

 

▼ 조선(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일본은 차근차근 조선의 숨통을 조이면서, 드디어 1910년에 문서로 확실하게 병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본에 강점당한 기간을 35년간이라고 하는데, 좀 더 들여야 보면, 1894년의 동학혁명(2차) 때부터라고 봅니다. 동학혁명 때 민비와 척족들의 요청으로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들은 동학혁명군, 양민 가릴 것없이 살육하였으니, 조선이 일본에 강점당한 기간은 50년 전후로 봅니다.

 

▼ 일제는 급격히 늘어나는 정치사상범(독립투쟁가)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기존의 경성감옥을 대체할 큰 감옥을 짓고, 서대문감옥으로 칭하였으며, 기존의 경성감옥은 마포 공덕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 1908년 부터 1943년도까지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인원을 나타내는 그래프인데, 독립운동가들의 수감인원이 최고 23,000명 이상이나 되었다니 놀랍습니다.

 

3.1 운동이 있었던 1919년, 1920, 1921년에는 급격하게 수감들이 늘었습니다

 

무자비한 탄압에도 독립투쟁에 뛰어든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는 기록이니, 그 당시 독립의 열망을 알 수 있습니다.

 

▼ [자료:공주아카이브] 공주감옥의 사진이며, 어느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경찰(간수로 추정)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0년대 전후로 보입니다

 

아마도 지방은 조선시대 옥사를 그대로 활용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 오자, 저항하거나, 방어전투 준비를 한 것은 대한제국 황실도, 제국군대도 아닌 의병들이었습니다.

 

▼ 기다란 장검은 곽한일의병장의 칼이며, 지팡이는 손잡이에 짧은 칼을 숨진 비상용 무기였는데, 손잡이에 직천김(直千金)이라고 새겨 있는데, 아마도 이름이 김천직(金千直)이었던 분의 호신용 지팡이 칼로 보입니다.

 

▼ 안중근의사는 이토히로부미의 처단에 성공하였으나, 이재명의사는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3번 찌르고 체포되었으나, 이완용은 즉사하지 않았으며, 이재명의사는 1910.9.30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시었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의 도움으로 대한의원(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전신)에서 간신히 살아났지만, 1926년, 60대 중반에 죽었습니다.

 

이완용보다 더 악랄하게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들도 있는데, 욕은 이완용이가 대표로 다 먹고 있습니다.

 

▼ 1919년 9월 2일 경성역(서울역)에서 사이코 마코토 총독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1920년 11월 29일 서문대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사이코 마코토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지셨을때 나이가 65세였는데, 대단한 역사적 소명을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 [자료:나무위키] 1919년 9월 2일 경성역 앞에서 강우규의사가 던진 폭탄에 죽을뻔했던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3대(1919년)와 5대(1929년)의 조선총독을 하였다.


▼ 수감자들이 노역을 할때 허리에 채웠던 요(?)인데 무게가 5Kg이라니, 들고 있기도 무거운 쇳덩어리인데, 혹시 발목에 채운 것이 아닐까요?

 

▼ 발목에 채우는건가?

 

▼ 수갑

 

▼ 용수는 독립투사들의 얼굴을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머리에 씌웠던 도구이며, 볏짚으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머리에 용수를 씌워 이동하는 모습입니다.

 

▼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목각판입니다

 

▼ 일제가 남기고 간 서대문 형무소의 수형기록표인데, 약 5000장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소장과 간수가 허리에 차고 다녔던 칼입니다.

 

▼ 재소자의 동작시한표이며, 일반수형자들에게는 공장에서 작업을 시켰는데, 그 시간표이며, 사상범(독립투쟁가)에게는 서로 얼굴을 보게 하지 않게 하려고, 작업은 시키지 않았습니다

 

▼ 3개의 감옥소를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한 곳에서 감시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현재 10 옥사, 11 옥사 12 옥사입니다.

 

▼ 지하에는 독방이 몇 개 있고, 취조실이 있는데, 잡혀온 미결수들이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받는 곳입니다.

 

▼ 독방은 1평 정도 되어 보이며, 뼁끼통이라는 대소변을 받는 나무통이 있었습니다.

 

▼ 지하의 취조실과 고문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악랄한 취조, 고문은 해방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자행되었습니다

 

▼ 나무막대기는 그렇다 쳐도, 쇠도리깨는 한 번만 맞아도 반병신이 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입니다

 

▼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관처럼 생긴 고문도구입니다. 몸은 물론 발도 꼼짝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 2층에 간수들의 사무실입니다

 

▼ 일제강점기의 옥사 내부의 모습니다.

 

▼ 현재의 옥사 내부 모습입니다

 

▼ 옥사내부를 보면 방마다 구조는 똑같습니다. 방마다 번호가 붙어 있고, 현재인원수, 재판으로 나간 인원수를 적어 놓는 검은색 판이 붙어 있습니다

 

▼ 간수가 방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닫혀 있고, 간수가 필요시 열어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 방에서 보면 간수가 방을 넓게 볼 수 있도록 마름모 꼴로 벽을 경사지게 만들었습니다

 

▼ 방마다 한 개씩 나무막대가 달려 있는데, 패통리라고 하며, 방에서 간수를 부를 때 나무막대를 떨어트려서 소리가 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 군사독재시기에 수감되었던 분들의 이력을 방마다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 옛날에 뉴스에서 가끔 보던 수의입니다.

 

▼ 서대문형무소 수의는 일본식으로 된 상의와 통바지로 되어 있었습니다(김기업-수의,1920년4월27일)

 

▼ 10 옥사와 11 옥사 사이의 연못은 서대문형무소의 초기 사형장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 한센병사 아래에 있는 사각연못의 터는 원래 일제강점기 때에는 나전칠기 공장이 있었으나, 1979년에 빨래터로 사용하려고 땅을 파서 물을 끌어 들었는데, 물은 옥사 뒤편의 안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었으며, 항상 물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 한센병 병자들의 별도 수감시설인 "한센병사"입니다

 

▼ 추모공간이며, 작은 사각형 판에 독립유공자분들의 이름을 새겨 조형물을 만들었습니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사형장입니다. 

 

▼ 일본식 건물 그대로입니다

 

▼ 사형장 내부의 모습입니다.

 

▼ 뒤에서 보면 기다란 레버가 있고, 레버를 당기면 발판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 1970년대에 사형수가 이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을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고사목이 되었습니다

 

▼ 사형장의 지하이며...

 

▼ 시신을 밖으로 몰래 옮기기 위한 긴 터널입니다

 

▼ 사형장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며, 옥사가 있었던 자리에 붉은 벽돌로 표시를 하여 놓았습니다. 이 옥사 자리는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이전한 후에 철거되었던 곳입니다.

 

▼ 격벽장이라고 하는데, 부채꼴로 만들어져 있으며, 재소자들의 간이 운동장이었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면 격벽장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 정면이 중앙사이며, 오른쪽이 전시장입니다. 중앙사 앞에도 철거된 옥사의 라기가 보입니다.

 

▼ 오른쪽에도 전시공간인 창고동이 있습니다.

 

▼ 창고동에서 아직도 후손들을 찾을 수 없는 독립투사들의 사진과 약력등이 기록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 다음은 여(女) 옥사를 보겠습니다.

 

▼ 8번 방이 유관순열사가 수감되었던 방이라고 합니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열사의 얼굴은 사실, 수감되면서 많이 맞아서 얼굴이 부은 상태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상태의 얼굴을 복원하면, 왼쪽의 사진처럼 됩니다.

 

▼ 8번 방에는 유관순열사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여성 독립투사들이 수감되었습니다.


▼ 2만여 명의 수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려면 취사장도 무척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일반재소자들에게는 식당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 틀밥(가다 밥)을 담아주던 그릇을 재현하였는데, 등급도 있어서 8단계로 배식을 하였으며, 사상범(독립투쟁가)에게는 배식의 양이 매우 적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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