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2층)에서 제일 큰 방을 쓰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사유의 방(思惟의 房) 전시장에 있는 국보 2점을 찾아보았습니다

 

보통은 1점씩 전시하는 것이 보통인데, 2점을 나란히 전시하면서 반가사유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극대화시킨 전시장으로 이해가 됩니다

 

고요하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 1400여 년의 세월을 건너서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2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보통 보던 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며,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의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뛰어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한층 더 먼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해주는 불상입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에서 반가(半跏)란,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어 앉는 ‘결가부좌(結跏趺坐)에서 한쪽 다리를 내려뜨린 자세로서, 반가부좌(半跏趺坐)의 줄임말이며,  사유(思惟)란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반가(半跏) + 사유(思惟)가 합쳐진 말로써 반가사유(半跏思惟)라고 하며,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으로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인 6세기(5001년~600년)와 7세기(601년~700년)에 걸쳐서 주로 신라, 백제에서 제작이 유행하였으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다만, 두 점의 반가사유상의 소장 경위와 제작지, 발견장소등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반가사유상의 공식명칭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지만, 미륵불로 보기에는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재질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금동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 사유의 방의 디자인은 건축가 최욱(원오원 아키텍스 대표)이,  미디어아트는 "장줄리앙 푸스"가 디자인하였습니다. 

※ 자료사진과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깊고 기다란 길을 따라서 사유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 시공을 초월한 초현실의 감각을 일깨우며 반짝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1,40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우리 앞에 있는,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만나러 갑니다.

 

▼ ‘사유의 방’에는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왼쪽은 국보 (구)제78호이며, 오른쪽은 국보 (구)제83호입니다.


마치 우주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공간에서 종교와 이념을 넘어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이탈하여 잠시 사유(思惟)의 시간을 가져 봅니다.

 

▼ 현실이 아닌 우주에 들어와 있는 듯 두 반가사유상이 시공을 초월하여 반겨주십니다.

 

▼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듯, 고뇌하는 듯,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 치유와 평안이 다가옵니다. 

 

신앙의 경지를 최고의 예술로 승화시킨 두 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은 세속의 감각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표정과 옷차림, 크기와 무게, 제작 시기도 모두 다릅니다. 

 

▼ 뒤에서 보는 반가사유상, 왠지 고뇌하는 보살을 보는 듯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료
반가의 자세는 멈춤과 나아감을 거듭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움직임 가운데 있습니다. 한쪽 다리를 내려 가부좌를 풀려는 것인지, 다리를 올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갈 것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가의 자세는 수행과 번민이 맞닿거나 엇갈리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살짝 다문 입가에 잔잔히 번진 ‘미소’는 깊은 생각 끝에 도달하는 영원한 깨달음의 찰나를 그려 보게 합니다. 이 찰나의 미소에 우리의 수많은 번민과 생각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의 주조기술(국립중앙박물관 자료)
 반가사유상에는 삼국시대의 최첨단 주조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 주조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수직과 수평의 철심으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대좌까지 뼈대를 세운 뒤에 점토를 덮어 형상을 만듭니다. 

거기에 밀랍을 입혀 반가사유상 형태를 조각한 다음, 다시 흙을 씌워 거푸집(외형)을 만듭니다. 거푸집에 뜨거운 열을 가하면 내부의 밀랍이 녹아 반가사유상 모양의 틈이 생깁니다. 

여기에 청동물을 부어 굳힌 다음 거푸집을 벗기면 반가사유상이 완성됩니다. 

이때 청동물이 굳으면서 거푸집이 깨질 수도 있기에, 매우 세심한 제작 기술이 필요합니다. 

두께 0.2~1.0cm 정도, 크기 1m에 가까운 금동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낸 삼국시대 주조 기술과 그 수준은 세계인이 놀랄 만큼 돋보입니다. 

주조 후 거푸집을 고정했던 장치나 못을 제거한 흔적도 보이지 않아 그 당시 금속 가공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제작 당시에 보수했거나 후대에 수리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_ 국보 (구)제 78호

 

※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1.5cm, 무게 37.6kg,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2789 

 

1912년 조선총독부가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에게 4,000원을 보상해 주며 구입했고,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입수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였고, 이왕가박물관(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1969년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습니다. 

 

▼ 전시실의 왼쪽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정제된 옷 주름 등이 특징으로 꼽힙니다. 양옆으로 휘날리는 어깨 위의 날개옷은 생동감을 주고,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걸이와 팔 장식은 화려함을 더합니다.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_ 국보 (구)제 83호

 

※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90.8cm, 무게 112.2kg,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3312

 

▼ 전시실의 오른쪽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으며, 단순하고 절제된 양식을 보여 줍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보관 寶冠의 형태와 두 줄의 원형 목걸이는 간결함을 더합니다. 

반면, 무릎 아래의 옷 주름은 물결치듯 율동감 있게 표현되어 입체적으로 흘러내리며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양손의 손가락들에선 섬세함이 느껴지고, 힘주어 구부리고 있는 발가락에는 긴장감이 넘쳐흐릅니다.

 

▼ 국보 반가사유상(오른쪽) 은 1912년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에게 2,600원이라는 큰돈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 두 반가사유상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왼쪽의 반가사유상이 예술성이 더 뛰어나 보입니다


▼ 금동반가사유상을 일본 주구사에 소장되어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과 비교해 보면, 머리 부분만 다르고 거의 완벽하게 비슷합니다. 종교나 문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나름대로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와 일본 광룡사(고류지)에서 소장되어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을 비교해 보면 너무 똑같아서 한 사람이 똑 같이 만들었거나, 어는 하나를 보고 복제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훼손되어 보수를 하려고 목제의 성분을 조사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자라지 않고, 경북봉화에서만 자라는 금강송(적송)의 재질로 밝혀지면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은 신라에서 만들어져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자연적으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 비숫한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도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23년, 신라에서 온 귀한 불상을 고류지(광룡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귀한 불상이 "고류지목조반가상"입니다

 

그런데 이 고류지 목조반가상은 일본 국보 제1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에서 곱게 내어주었는지 아니면, 약탈해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째... 좋게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현재 일본에 있는 반가사유상 3점의 자료사진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른쪽의 광룡사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은 전혀 일본식으로 보이지 않는데, 신라에서 건너간 작품으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반가사유상은 2점입니다

 

▼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과 경북 봉화 석조반가사유상의 하부를 비교해 보면, 옷자락의 모양이 매우 비숫해서 마치 한 사람이 만들었거나, 어느 한쪽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보일 정도입니다.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의 경우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데, 석조반가사유상은 경북봉화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도 경북지역에서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해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서양과 동양 또는 종교적인 개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사람의 내면적인 감정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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