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이 있는 해안이 많은 지방에서 가끔 보이는 매향비는 주로 고려시대에 많이 설치했는데, 불교의식으로서 후세에 오실 미륵불에 올릴 향을 만들기 위한 행위로써 주로 지역의 향도와 지역사찰의 지도자 스님이 주도적으로 매향을 하였습니다.

 

매향의식의 증거인 매향비는 주로 충청도 내포지역의 해안지대에서 많이 보입니다


▼ 예산의 효교리 매향비를 찾아가는 길은 좀 애매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도라지가든(폐업)에 주차를 하고 농로를 따라서 약 200미터 정도 걸어서 밭으로 들어가면 됩니다만, 밭에 작물이 없을 때는 밭을 가로질러서 찾아가도 될 듯싶습니다.

 

매향비를 안내하는 안내판이 없으므로 효교교회에 잠시 주차를 하고 찾아가도 되는데 여름에는 밭에 작물이 자라서 찾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 주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예덕로 321-13( 이 주소 뒤 밭에 있습니다)_주차할 곳은 없음

 

▼ 시멘트길 옆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걸어 들어가면 됩니다

 

▼ 이놈을 만나면, 효교리 매향비를 제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놈이 사는 집 뒤에 매향비가 있습니다.

 

▼ 저 멀리 효교교회가 보이고 우측에 매향비가 보입니다만, 교회에서는 매향비가 안 보입니다.

 

▼ 매향비가 보통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의 낮은 언덕에 세워지는데, 웬일인지 산속의 밭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향비가 지금의 밭에 있는 이유는 매향비를 세울 때에는 효교리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지만,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모두 논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마치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매향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 효교리 매향비에서 바라보는 들판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매향비 앞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습니다만, 간척사업으로 갯벌은 논으로 바뀌었습니다.

 

▼ 효교리 매향비는 충남기념물입니다. 그런데 지방별로 보면, 같은 매향비인데도, 문화재로 등록이 되기도 하고, 문화재보다 격이 낮은 기념물로 관리되기도 합니다.

 

▼ 효교리 매향비는 마되바위라고도 하는데, 보부상들이 식량의 크기를 재는 표준도구로 사용하려고 바위에 홈을 파 놓았습니다.

 

매행비문은 마되바위 양쪽에 각서(刻書)되어 있는데, 이미 홈을 파 놓은 상태에서 홈 주변에 매향비문을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 안내판의 안내문이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페인트가 벗겨졌습니다. 사실 이런 안내판은 시인성이 좋기는 한데, 세월이 지나면서 페인트가 떨어지니 참! 관리하기가 어렵겠습니다.

 

▼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를 인용해서 효교리 매향비를 알아보겠습니다.

매향은 침향을 만들기 위하여 향목을 갯벌에 묻어두는 행위를 말한다. 매향비는 매향을 한 후 그 사실을 암각이나 비의 형태로 새겨 증거를 남겨놓은 것이다. 효교리 매향비는 일명 마되바위로도 불린다. 매향비 밑에는 지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놓여 있어 고인돌의 개석에 매향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의 중심에는 원형의 홈이 파여 있으며 그 주변에도 장방형의 홈이 두 개 있다. 이 홈은 말()과 되(), 홉 등으로 불려왔는데 보부상들이 말과 되를 재는 도량형 역할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중앙에 파여진 원형의 홈 양 측면에는 음각한 명문이 있는데 계미년에 이산(伊山덕풍(德豊) 사람들이 용오리(龍吾里)에 매향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효교리 매향비는 다른 지역의 매향과 마찬가지로 미륵불의 용화회에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는 불교신앙 활동과 관련이 있다. 비의 조성 시기는 대략 1403(태종 3)으로 추정된다.
 

 

▼ 이 매향비는 고인돌의 덮개돌에 비문을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매향비는 바위 또는 글씨에 특별한 규격이 없었으며, 주변의 적당한 바위에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글씨를 새겼습니다.

 

▼ 중앙의 둥그런 홈은 말(斗;두)이라고 하며 매향비문은 홈의 양쪽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래쪽의 사각형 홈은 되(升;승)이며, 왼쪽의 작은 사각형은 홉이라고 합니다.

 

▼ 참고로 곡식의 부피를 재는 도구들의 크기를 알아보았습니다.

 

▼ 오른쪽 비문의 내용을 보면, [ㅁㅁ六年 癸未三月十 二日伊山德豊袈裟 結()香徒告 城出龍吾里?頭 埋香庫同].”라는 내용이며, 한자를 풀어 보면...

 

“ㅁㅁ6년 계미 3 12일에 이산(伊山)과 덕풍(德豊)의 승려와 결연 향도들이 축대를 쌓아 비석을 올려놓고 고한다. 성에서 나와 용오리 들머리에 매향을 도감(都監) 승려들이 함께 하였다.라는 뜻입니다

 

효교리 매향비를 고려시대로 보는 이유는 비문에 보이는 이산과 덕풍이라는 지명 때문입니다. 이산과 덕풍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때는 고려 1018년 에서부터 조선 1405년이 되는데, 이 사이에 계미년은 1043년(고려 정종 9년)과 1403년(조선 태종 3년)이 있었지만, 비문에 보면 승려가 주도하여 매향을 하였으므로, 조선시대가 아닌 고려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산과 덕풍은 태종 5년에 덕산현으로 개편되었으며, 조선 헌종 때는 헌종태실을 태봉으로 가봉하면서 덕산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 매향비의 좌측의 비문을 보면, [峯巒間一万 二七□□間□富菜(乘) 香(會)主埋香□(彌)勒前],  뫼뿌리 사이에 일만(一万) 이칠(二七)사이에 많은 나물로 향주(香[會]主)가 미륵 앞에 매향을 하였다.”라는 내용입니다.

※ 峯(봉우리 봉) , 巒(멧부리 만, 뫼 만), 향주(香主)는 향도의 우두머리로 보통 지역 사찰의 스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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