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의 보덕사는 남연군묘에서 멀지 않은 서원산에 있으며, 상가리 미륵불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문화재로는 극락전, 삼층석탑, 석등이 있습니다.
▼ 주차장에서 곧바로 올라가는 길이 보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님들이나, 신도들께서 오르내리던 계단이었는지, 산속 절집 분위기가 바로 느껴집니다.
▼ 계단길 옆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양쪽에서 길손을 맞아 줍니다
▼ 어느 여스님의 승탑과 승탑비인데, 승탑은 고려시대의 승탑처럼 아름답게 다듬었으며, 탑비에는 妙理比丘尼 法喜禪師塔碑(묘리비구니 법희선사탑비)라고 각서(刻書)되어 있습니다.
▼ 예산 보덕사는 옛날 절집처럼 낮은 지붕의 법당과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의 절집을 보는 맛이 느껴지는 조용한 절집입니다.
보덕사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이전할 명당을 찾아서, 가야사 금탑의 자리가 명당자리라는 풍수설을 믿고, 가야사에 불을 질러서 폐찰(閉刹)시키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대원군은 아들(고종)이 조선 26대 왕에 즉위하자, 불 살라버린 가야사를 승계하도록 하여 서원산 중턱에 절을 짓고 가야사를 불태운 죄에 대해 사죄하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 부처님의 은덕을 갚는다는 뜻으로 보덕사(報德寺)라고 하였습니다.
▼ 아름다운 배롱나무꽃이 이제 막 꽃망울을 열고 화사한 꽃잎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꽃이 만발할 것으로 보입니다.
▼ 보덕사의 전각을 둘러보겠습니다.
▼ 뒤에 극락전이 있는것을 깜빡하고, 그냥 왔네요...
▼ [자료:문화재청] 예산 보덕사의 극락전(시도유형문화재)입니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둘째아들(고종)이 등극하자, 고마움과 사죄의 뜻으로 사찰을 짓고, 보덕사라고 하였는데, 그때 지어진 불전입니다
▼ 보덕사의 마당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 이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 원래는 가야사터에 있었으나, 1914년 일본인이 몰래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 주지(김관용)가 찾아와서 에산군청에 보관하다가 2000년에 보덕사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일본X들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반출한 문화재들이 작은것, 큰것 가리지 않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통일신라시대 부터, 고려, 조선이 망할 때 까지 훔쳐간 문화들은 정작 일본의 문화재로 둔갑되어 있는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원래는 오층석탑이었으나, 훼손되어 삼층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되는데, 기단석이나, 몸돌에 기둥 모양의 우주나 탱주는 안 보입니다.
▼ 옥개석들의 한쪽 귀가 깨져 있는 것을 봐서 도굴의 흔적으로 추정합니다. 상대갑석을 보면 각층의 탑신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2층, 3층의 탑신석은 마치 후보 한 것처럼 보입니다.
▼ 보덕사의 석등은 일반 석등 보다 무척 큰 석등인데, 화사석를 제외한 석재는 나중에 화사석의 크기에 맞게 맞춘 것입니다.
화사석의 조각기법을 보면 고려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도 볼 수 있는데, 가야서터에 있었던 석등으로 추정합니다
▼ 안내판의 글씨가 거의 안 보여서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보덕사석등(報德寺石燈)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보덕사의 석등은 보덕사 안에 있는 조선시대 석등이다. 석등은 불을 밝히기 위해 세우는 구조물을 뜻하는데 사찰의 석등으 단순히 조명 역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인 부처의 가르침으로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마음을 밝힌다는 상징성이 있다. 석등은 불전에 등불을 공양한다는 의미로 사찰의 중심인 법당이나 탑앞에 있다. 조선 시대 말에 흥선대원군이 명당으로 알려진 가야사 터에 절을 허물고 아버지 남연군의능을 모셨다. 그 후 왕손이 번창하자 대원군은 가야사의 공덕이라고 하여 그 보답으로 1865년 (고종 2)에 지금의 장소에 보덕사를 세웠다, 보덕사 석등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보덕사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 가야사지에 있었던 석등으로 추정된다. 보덕사 석등은 불을 밝히는 팔각형의 화사석만 남아 있었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화사석을 제외한 모든 부재를 새로 만들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올 수 있도록 열십자 형태로 창을 내었고, 나머지 네 면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석등에 사천왕을 새겨 넣느 것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는 석등 조각의 특징이다. |
※ 안내문에 석등을 조선시대의 석등이라고 하였으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또는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 보덕사 마당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등의 화사석입니다. 화사석을 잘 보관하였다가 화사석을 제외한 부재들을 갖춰서 지금의 석등으로 복원하였습니다.
▼ 화사석을 제외한 모든 부재는 새로 만들어서 적절하게 조화로운 석등의 멋을 복원하였습니다.
▼ 4면에 각각 사천왕상을 새겼습니다. 마모 상태가 좀 심하기는 하지만 세밀한 조각기법은 매우 훌륭합니다
▼ 석등의 옥개석으로 보이는데, 훼손상태가 심해서 대충 형태만 가늠해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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