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대흥면 대흥동헌 뒤뜰에는 척화비가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이 척화비는 원래 개뱅이다리(가방교;수몰되기 전에 해체) 근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다가 1978년 당시 강보희 대흥면장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척화비가 세워질 당시 지금의 예산시 지역인, 예산현, 대흥현, 덕산현 세 곳에 척화비가 세워졌었는데, 현재는 대흥의 척화비만 남아있습니다.

 

※ 자료사진과 내용은 문화재청, e뮤지엄, 충남도청 블로그등에서 인용하엿습니다.


▼ 대흥동헌 뒤뜰에는 화령옹주태실과 척화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동헌 뒤뜰에 있다 보니,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으신 분들께는 응~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척화비에 대해서 알아 보겠는데, 척화비(斥和碑)라는 한자의 뜻을 풀이해 보면, 화친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아무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는 것인데, 지금 시대로 보면 미친 짓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전국에 수백개를 세웠는데, 지금의 지방자치단체 정도 되는 군, 현에 대부분 설치했습니다만, 왜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 병인양요가 있기 전 1866년 8월 21일에 제너럴 셔면호가 대동강을 한강인줄 알고 있었는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평양 가까이 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셔면호에 있던 미국인들이 평양 근처를 용산이나 노량진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평양의 관리들이 이를 거부하고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인들은 교섭거부에 화가 났는지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행패를 부리자 관리들과 평양사람들이 셔면호를 불살라 버렸는데 이때 대부분의 셔면호 선원들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세력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고 또한 아! 서양? 별거 아니구나...라는 자신감을 가졌을 수 도 있습니다

 

- 프랑스가 1866년 11월 22일에 조선의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열받은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반포하며 쇄국의지를 표명합니다

 

- 더군다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파헤친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년) 이 일어나면서 흥선대원군은 서양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 1871년 미국의 해군과 해병들이 여러 척의 전투함을 타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을 작살내고, 광성보에서 조선군을 전멸시키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는데, 제너럴 셔면호에 대한 복수겸 조선에게 크게 한방을 먹이겠다고 작심하고 싸움을 걸어온 미국의 해군과 해병대를 상대하기에는 조선군은 너무너무 약했습니다. 전투의지는 매우 강했으나 거의 맨손으로 싸웠으니,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화가 단단히 났고, 전국의 군현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 비석에는 병인양요 이후 반포했던, 글귀를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측화 주화매국)

: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 내가(우리가) 자손만대에 경계토록 하기 위해, 병인년에 글을 짓고, 신미년에 비를 세운다

 

-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이 조선의 문을 열게 하라는 바통을 일본에 넘기면서 결국 일본의 무력 앞에 조선의 문을 열리게 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은 서양에 대한 개방으로 근대화 국가로 발전하였지만, 조선은 국외의 정세에 너무 어두워서 반대로 문을 닫았던 결과는 너무너무 차이가 컸습니다.

 

지나친 상상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자호란때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조선보다 앞서 있는 서양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소현세자(인조에 의해 독살)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아마도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소현세자가 아니더라도 조선에는 여러 번의 국가를 업그레이드할 뻔했던 때는 많았다고 봅니다. 다만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만 눈이 먼 위정자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 참 아쉬울 뿐입니다.

 

뭐~ 지금도 권력과 돈에만 진심인 x들 아~주 많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에서 보면 아주 특이한 사람인데, 보통은 왕이 어려서 왕이 되면 대비들이 섭정을 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다가 어느 정도 왕이 정치의 쓴맛, 단맛을 알게 되면, 대비들은 손을 떼게 되는데,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해서 너무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습니다

 

고종 초기에는 너무 부패한 풍양조씨와 안동김씨들의 행패를 진압하고, 사적인 권력의 중심인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가로서의 업적은 알아줄 만합니다만,

 

세계정세의 흐름을 너무 모르고 근대화 국가의 기회를 저버린 것과 며느리 민비와의 권력투쟁으로 외국군대(청군, 일본군)를 서로 불러들이다가 결국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에 잡혀가고, 민비는 일본깡패들에게 칼침을 맞고 불태워지는 꼴을 당하고 말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고통은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안내문이 보기는 좋은데, 글자를 사진으로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안내문을 크게 확대해 봤는데도 알아보기가 어려워서 글 전체를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안내문의 내용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북한과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척화비는 두번의 양요(병인양요-프랑스, 신미양요-미국) 이후 당시 왕이었던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척화 교시를 내려 전국 각지에 세우게 한 비석이다.

내용을 보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측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오,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는 파는 것이다.
내가 자손만대에 경계토록 하기 위해, 병인년에 글을 짓고, 신미년에 비를 세우노라.

'병인작 신미립' 이라는 글귀에서 두 차례의 양요가 척화비 건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과의 직접적 대결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본격적인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펴게 된다.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철저히 거부하므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 척화비 건립은 반외세 자주 운동으로 해삭되어 민족의 자주권을 지켰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무조건적인 서양 세력과의 통상 거부로 인해 조선이 국제 정세 흐름에 둔감해져서 근대화가 정체되거나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외세의 침략을 맞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 대흥 척화비의 상태는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글씨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개뱅이다리 근처에 있을때 깨진 것으로 보입니다.

 

▼ 척화비가 있었던 개뱅이다리(가방교)의 위치를 포털의 지도서비스와 자료사진을 이용하여 알아보았습니다

 

※   [자료사진:충남도청]  예당저수지가 물에 잠기기 전의 1962년의 모습입니다_5번이 개뱅이다리(가방교)입니다.

 

▼ 척화비를 건립한 지 약 5년 후인 고종 13년(1876년)에 결국은 일본의 무력 앞에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의 문은 비로소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의 배후자로서 청군에 체포되어 청나라에 잡혀 가자, 전국의 척화비를 해체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아마도 배후에 일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고종의 척화비 해체 칙령을  기점으로 전국의 척화비 대부분을 철거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척화비는 없어지고,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대흥 척화비는 용케도 살아남았습니다.

 

대흥 척화비의 상단이 깨진 것은 오랜 세월 방치된 흔적으로 보입니다.

 

척화비가 대부분 없어지기는 했는데, 전국에서 보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일부는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기도 합니다

 

특이한 것은 전국의 척화비가 글자나 형태가 똑같다는 것인데, 아마도 척화비를 세우라고 할 때 미리 지침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잡혀갔던 흥선대원군의 모습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 고종은 척화비를 뽑아 버리고 비로소 서양에 대한 배척을 끝내기로 하고, 미국을 비롯하여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통상교섭조약을 맺었습니다.


▼ [자료사진:e뮤지엄] 참고로 자료사진으로 척화비를 보겠습니다. 전국의 척화비 비문은 똑같습니다

 

 

▼ 전국에 단 하나뿐인 자연석 척화비는 매우 특이한데, 구미의 척화비입니다

 

▼ 간혹 척화비의 비문을 탁본한 자료도 있습니다.

- 이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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