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암(採雲庵)의 자료를 찾아보면,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화양천을 건너 마주 보이는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있었고, 지금의 자리에는 환장암(煥章庵)이 있었다고 합니다.

채운암은 고려 충열왕 3년(1277)에 도일선사(道一禪師)가 창건하고 ‘수도암(修道庵)’이라 하였는데, 조선 광해군 2년(1610)에 혜식선사가 중창하고 ‘채운암’이라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자리에는 효종 4년(1655) 혜일선사가 ‘환장암(煥章庵)’를 창건하였는데, 환장암(煥章庵)을 창건한 이유는 숙종 때의 민정중(閔鼎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의 어필 ‘非禮不動(비례부동)’의 휘호를 가지고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니 송시열이 화양동에서 이 글씨를 바위에 새겼고, 송시열의 뜻에 따라서 글씨를 보호하는 수직사찰(守直寺刹)로서 환장암(煥章庵)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왕릉을 지키는 절(원찰)은 있었어도, 글자를 지키라고 암자를 창건했다는 것은 처음입입니다. 그만큼 그때의 우암 송시열과 사림(노론)의 파워가 대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후 환장암은 한말 왜병들의 방화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고,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1948년 홍수로 매몰되자 1949년에 요사채의 일부를 이곳에 옮겨 환장암과 채운암을 합쳐 증축하고 채운암이라 통칭하였다고 합니다.

 

※ 채운암 대웅전 안내문에는 창건할 때 우암 송시열이 욱장사(煜章寺;빛날 욱, 글장, 절사)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 화양구곡의 제 6곡 능운대 옆으로 채운암에 드나드는 길이 보이는데, 걸어서 10분 정도면 채운암에 도착합니다.

 

▼ [자료:문화재청]  하늘에서 보는 채운암입니다. 

 

▼ 채운암 입구에서 바라보면 잘 정비된 암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곡 능운대에서 가까운 거리지만, 사람들이 들리기에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끼는지 사람들이 안 보입니다.

 

▼ [자료사진] 일제강점기때인 1921년에 찍은 환장암(煥章庵)의 모습이며, 환장암은 1948년 이후에 건너편 첨성대 부근 계곡에 있었던 채운암이 홍수로 매몰되자, 남은 자재를 합쳐서 다시 짓고, 채운암이라고 하였습니다.

 

▼ 채운암은 크게 요사채, 대웅전, 삼성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채운암 대웅전은 크지는 않지만, 추녀가 드높이 추켜져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며 충북 문화재자료입니다. 채운암에는 복장기를 가진 목조여래좌상이 대웅전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 많은 자료에는 대부분 지금의 자리에 처음 창건한 절집은 환장암(환장사)라고 되어 있으나, 안내판에는 욱장사(煜章寺)라고 쓰여 있습니다.

 

언제 중수를 하였지는 알 수 없으나, 중수시 발견된 묵서(墨書)에 “도광육년병술(道光六年丙戌)이라는 상량(上樑)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도광 6년이면, 조선 순조 26년(1826)이 됩니다. 즉 순조 26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도광(道光)은 청나라 재 8대 황제인 선종(宣宗)때 쓰던 연호입니다.

 

▼ 대웅전 기둥 상부에 각각 황룡과 청룡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절집마다 대웅전의 창호는 품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절집에 가면 창호의 문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채운암 대웅전 창호에는 빗살 위에 청룡과 황룡, 봉황, 학, 소나무, 매화, 구름 등이 조각되어 있는 보기 드물게 예술적 능력이 좋은 목수(소목)의 작품입니다.

 

▼ 채운암 대웅전의 수미단에는 석가모니불과  좌, 우에 협시불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 채운사 목조여래좌상은 충북유형문화재이며, 높이가 70㎝이고 빛나는 금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목조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복장기(腹藏記)에서 조선 경종 3년(1723)에 길쌍계사(吉雙溪寺)에서 만들어졌다는 기록으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었습니다만, 언제 이 채운암(당시에는 환장암)으로 옮겨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길쌍계사가 어디에 있었던 절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 요사채 옆에 작고 아담한 삼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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