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사지는 은봉산 중턱에 있던 절터로서,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을 볼 때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언제 폐사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안국사지로 알려진 곳에 남아있는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석탑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한  "배바위" 또는 "고래바위"로 불리는 자연석의 통바위인 당진안국사지매향암각 (唐津安國寺地埋香岩刻)은 충청남도기념물입니다.

※ 주소 : 충남 당진시 정미면 원당골 1길 188(충남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687-1)

▼ 안국사지에 보면 커다란 바위들을 모아 놓고, 바위 사이로 문을 내어 올라가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안국사지의 발굴조사후에 바위들을 모아서 작은 볼거리를 만든 듯합니다.

 

▼ 바위를 모아 놓은 곳에 올라서 보면 작은 정원처럼 꾸며 놓았습니다. 넓다란 바위에서 잠깐 쉬기에는 그만입니다.

 

▼ 바위동산에서 바라보는 석조여래삼존입상입니다.

 

▼ [자료사진]  하늘에서 보는 안국사지의 모습이며, 현재의 안국사는 안국사지의 사찰과는 다른 사찰입니다

 

▼ [자료사진] 붉은색 원이 안국사지 법당의 자리이며, 발굴조사후 보존상태로 있습니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및 석탑(보물)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시기는 2003년 발굴조사시 출토된 太平중국 요나라 성종의 연호 명문기와로 보아 고려 현종 12~21년 1021~1030 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과 몸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머리에 네모난 갓 모양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두 팔과 두 손이 신체에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脇侍菩薩도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 하단의 석탑은 원래 5층일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겹쳐져 있으며 받침부의 구조는 매우 간략하다.

1층 몸돌의 네 모서리에 기둥 형태가 표현되어 있고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 1면에는 문고리형이 조각되어 있어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불상과 석탑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던 양식으로 혼란기 백성들이 마을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거칠고 섬세하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구원사상을 넘어 힘든 현실 세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지역공동체의 모습이 엿보인다.

 

▼ [자료사진:e뮤지엄] 일제강점기 1920년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처참한 상태이며, 석탑은 도굴이 됐는지 옥개석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습니다.

 

▼ 1980년대 발굴조사전에 찍은 사진을 보겠습니다.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당진 안국사지 석탑 (唐津 安國寺址 石塔)-보물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基壇部)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의 탑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다소 엉성해 보인다. 

탑신(塔身)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 이 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보기에는 매우 엉성하고, 상부는 옥개석만 포개져 있습니다. 이 탑이 원래 몇 층 짜리 탑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데, 5층 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며, 현재 남아 있는 옥개석은 4층까지만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1층 몸돌은 남아 있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어서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고 있으며, 옆에는 탑신석만 혼자 남아 있는데 이 또한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1층 탑신석의 크기에 비해서 옥개석은 매우 크게 보여서 약간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안정감이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

 

▼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는 탑신석이며, 4면에 보살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안국사지에 있었던 탑의 일부였는지 아나면, 다른 폐사자에서 옮겨온 탑신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자료:e뮤지엄] 1920년대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에서 보는 무너진 석탑의 모습입니다. 도굴된 듯한데, 분명 무엇인가 꺼낸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석조여래삼존입상 (唐津 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의 중앙 본존불은 높이가 4미터 정도 매우 기다란 형태를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거대석불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향좌측의 불상은 불두가 거의 파손된 상태로 얹어져 있습니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唐津 安國寺址 石造如來三尊立像)-보물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시기는 2003년 발굴조사시 출토된 太平중국 요나라 성종의 연호 명문기와로 보아 고려 현종 12~21년(1021~1030)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과 몸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머리에 네모난 갓 모양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두 팔과 두 손이 신체에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脇侍菩薩)도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불상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던 양식으로 혼란기 백성들이 마을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거칠고 섬세하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구원사상을 넘어 힘든 현실 세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지역공동체의 모습이 엿보인다.

 

 

▼ 석조삼존여래입상 앞에 보이는 것은 보통 향로석(香爐石) 또는 배례석(拜禮石)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봉로대(奉爐臺)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 본존불의 얼굴은 다 좋은데 입술이 좀 빈약합니다. 

 

▼ 본존불의 좌,우에 협시보살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불행하게도 좌협시 보살은 불두가 훼손상태가 심합니다.

 

▼ 그래서 보살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드렸습니다...언듯 봐서는 잘 모르겠죠?


▼ 석조여래삼존불입상 뒤로는 거대한 바위가 보이는데 마치 고래바위처럼 보입니다만, 매향비입니다.

 

▼ 보통 향나무를 묻는 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묻는데, 현재 매향비의 위치로 봐서는 갯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지만, 지도를 보면, 수당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증거는 이 지역이 갯벌을 메워서 논으로 만든 간척지라는 것입니다.

 

흰색 원이 있는 지역이 향나무를 묻었던 곳으로 추정이 되며, 그리고 매향기록을 배바위에 각서(刻書)한 것으로 보입니다.

 

▼ 향나무를 갯벌에 묻는 매향의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까지 이어져 왔으며, 지역의 사찰일을 도맡아 하던  마을의 향도들과, 향도들을 이끌던 지역 사찰의 지도자급 스님이 매향의식을 치렀습니다.

 

매향비는 주로 서해안지역에서 발견이 되며, 섬에서도 발견이 되는데, 동해안이나 남해안 지방에서는 매향비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매향기록을 새기는 매향비는 특별한 규격이나 형식이 없이 그냥 주변의 적당한 암석의 평평한 곳에 새기는데, 글씨의 형식도 정체로 새기지 않고, 자유운 글씨로 새겼습니다

 

▼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배바위 아랫 부분에 두 곳으로 나뉘어 암각(巖刻)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배바위에  시대를 달리하여 매향기록을 새겼다는 것인데, 즉 2건의 매향기록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 자료를 인용하여 매향기록을 알아보겠습니다.

 

배바위 오른쪽에는 庚戌十月日 鹽率西村出浦 ㅁ木香埋置(경술십월일 염솔서촌출포 ㅁ목향매치) 라는 명문이 있다.

 

 : 경술년 10월에 염솔 서쪽의 출포마을에 ㅁ木가 향나무를 묻었다(염솔은 봉화산 서쪽의 마을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경술년을 찾아 보면, 950년(광종원년) , 1190년(명종 20) , 1250년(고종 37) , 1370년(공민왕 19)등이 있지만 어느 년도라고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배바위 왼쪽에는 庚午二月日 余美北天口 浦東際埋香 一丘 化主覺先 結願香徒(경오이월일 여미북천구 포동제매향 일구 화주각선 결원향도)’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 경오년 이월 선각이라는 화주가 향도를 결성하여 여미현의 북쪽에 있는 천구포 동쪽에 향을 묻었다

 

매향 암각문 중 경오년의 연대에 대해서는 고려 전기로 보는 견해와 고려 후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 전기로 보는 견해는 경오년을 970년(광종 21) 혹은 1030년(현종 21)으로 추정한다. 이에 반해 고려 후기로 보는 견해는 경오년을 1270년(원종 11), 1330(충혜왕 1), 1390년(공양왕 2) 중 하나로 상정하고 있다.

 

여미(余美)’는 여미현을 말하는 것으로, 여미현과 정해현이 합해서 해미현이 되기 이전, 즉 1407년(태종 7) 이전에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국 연호가 아닌 ‘경오년’으로 썼다는 점에서 원나라 초기인 127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천구포’는 현재의 천의포로 추정된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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