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의 화양천 계곡옆에 세워진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화양동의 화양구곡에는 송시열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곳으로써, 조선 최고의 지성이면서 조선 최고의 골칫거리였던 우암 송시열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겠습니다.
▼ 우암 송시열은 나이 43세 관직에 나갔는데, 워낙 아는 것이 많고, 주자학으로 무장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상소를 올렸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 이상이 이름이 오르내려 조선최초의 기네스북에 오를 뻔한 인물이었습니다.
성격이 너무 곧아서, 적이 많았으며, 효종이 북벌을 하자고 했을 때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므로 내부적으로 준비를 더 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설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무리 상소의 달인이었던 우암 송시열도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에 책봉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상소하였다가 정치의 달인 숙종한테 잘못 걸려서, 제주도 유배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2세에 죽었습니다
▼ 괴산 송시열유적 안내판이 잘 안 보여서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적었습니다.
괴산 송시열 유적(傀山 宋時烈 遺跡)-사적 우암 송시열(1607~1689,82세)이 말년을 지낸 곳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가 있던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조선효종(1649~1659 : 재위 10년)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 유적은 송시열 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으로, 일제가 파괴하였으나 2006년까지 만동묘 7동과 화양서원 2동을 복원하였다. 유적 주변에는 송시열 선생과 관련된 암서재(巖棲齋), 읍궁암(泣弓巖) 외에 '충효절의(忠孝節義), 빌례부동(非禮不動)'등 바위에 새긴 글자(암각자)가 많이 남아 있다. * 화양서원(華陽書院,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렀던 장소에 세운 서원으로 기호학파 학자들이 많이 모이던 장소) *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 |
[자료사진:괴산군청] 그림에서 보면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건물들의 배치를 알 수 있는데, 송시열선새의 선생을 모신 사당을 송자묘(宋子廟)라고 표시하였는데, 송시열의 학문의 경지를 공자, 주자와 같은 반열에 올렸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건물의 배치상태를 보면 지금과는 다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자료:리플릿] 연경재전집에 그려져 있다는 만동묘의 배치도인데, 화양서원의 건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 보입니다.
▼ 길에서 들여다보는 화양서원의 숭삼문이며, 뒤에는 송시열의 사당인 송자묘((宋子廟)입니다.
▼ 길옆에 보이는 화양서원 묘정비입니다.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화양서원 안에 있었는데,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 찾아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傀山 華陽書院 廟庭碑)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숙종42년(1716)에 세운 곳이다.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으며, 안진경의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 서원이 철폐되면서 이 비도 땅속에 묻히게 되었던 것을 광복이후에 묘정비를 찾아 다시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사액되었으며,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많은 논란 속에 철종 9년(1858)에 복주촌이 폐쇄되고 고종 7년(1870) 훼철되었다 |
▼ 만동묘와, 화양서원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2006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중앙문은 양추문(陽秋門), 좌측은 증반청(제사음식준비), 우측은 존사청(제례복을 갖춰 입는 곳)입니다.
▼ [자료:괴산군] 1980년대 전후로 보이는데 아무것도 없는 사진이며, 발굴조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화양서원은 두 채의 건물만 복원이 되었으며, 원래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많았으나, 고종 때 훼철(헐어서 치워버림)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2006년에 두채만 복원이 되었습니다.
▼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송자묘)인데, 화양서원의 현판을 달았습니다.
▼ 풍천재(風泉齋)는 선비들이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잠시 머무른 곳입니다
▼ 풍천재의 뒷모습입니다.
▼ 만동묘로 들어가는 양추문(陽秋門)으로 스승의 가르침은 가을의 태양과 같다는 뜻입니다.
▼ 만동묘에 들어 오면 정면에 성공문이 보입니다
▼ 우측에 보이는 것은 만동묘정비각입니다
▼ 이 만동묘정비는 명나라의 신종(만력제)과 의종(숭정제)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인데,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일제는 1942년에 일체의 건물을 철거하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 버렸는데,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습니다.
▼ 일제는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글자마다 정으로 쪼아서 글자를 뭉개버렸습니다. 그나저나 탁본이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만동묘로 오르는 계단을 폭이 좁고 극심하게 가팔라서 아주 조심조심 올라가야 합니다 옆으로 해서...
▼ 만동묘입니다.
▼ 만동묘 앞에 눈길을 끄는 두 개의 석주(石柱)가 보이는데, 등롱대 같기도 하고, 관솔대 같기도 합니다
▼ 위에서 보면 움푹 들어가 있는데 제사 때 쓰이는 물을 올려 두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무래도 관솔을 태워 불을 밝히는 관솔대로 보입니다.
▼ 명나라 신종(만력제)과 의종(숭정제)의 신위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던 만동묘의 내부 모습입니다.
▼ 사당 앞에서 바라보는 성공문입니다.
▼ 양추문 너머 능선이 아름답습니다만,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면서 더욱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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