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대흥동헌 및 아문(禮山 大興東軒 및 衙門)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로서,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입니다
대흥동헌은 뒷산은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이며, 앞에는 예당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료: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흥면의 변천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 삼한시대 : 마한의 지침국중 일부로서 지심현이라 지칭, 임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
- 660년 : 백제군이 임존성에 입성해 항거 및 백제부흥운동 전개
- 1172년 (고려 명종 2년) : 감무라는 관아를 두어 통치
- 고려 말기 : 대흥현(대흥,광시,신양,응봉지역)을 설치하고 현 대흥면사무소옆에 동헌을 짓고 현감을 둠
- 조선 초기 : 홍주(홍성)목에 속함
- 1413년 (조선 태종 13년) : 대흥현이라 지칭
- 조선 숙종 : 현종의 태실을 가봉하면서 대흥군으로 승격
- 1914년 3월 1일 : 부군면 통폐합으로 대흥현,예산현,덕산현을 통합한 예산군에 편입되어 대흥면이 됨.
▼ 대흥군 관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역대 현감들의 공덕비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습니다. 보통 조선시대의 고을에서는 수십 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흥군의 이 공덕비는 대부분 예당저수지 지역에 있었는데, 이제는 대흥관아 입구에 모아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봉수산이며, 백세 부흥군이 당나라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임존성이 있는 곳이며, 임존성을 함락시킨 사람은 백제부흥군의 장군이었던 흑치상지였습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장수였으나, 백제부흥군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자, 이틈을 노린 당나라의 투항 권유에 따라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임존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이 곳에서 전투를 벌여서 크게 이겼는데, 이때 대흥(大興)으로 지명을 고쳤다는 곳입니다.
▼ 대흥초등학교 옆에 세워져 있는 멋진 정자이며, 역사적으로 기록이 있었던 정자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이 자리는 아마도 대흥객사(大興客舍)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정자의 현판이 없어서 정자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은사정(恩思亭)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 대흥동헌앞에 보는 모습이며, 관아의 정문인 임성아문이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는 삼문형태로 양쪽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위치로 보나, 문의 규모로 보면 아문이 아닌 동헌의 삼문인데, 굳이 아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때 동헌자리에 대흥면사무소가 있었으나, 면사무소를 옆으로 이전시키고 1974년 복원하였습니다
▼ 동헌앞에는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있으며, 안내문이 있습니다.
▼ 내부에는 효제각(孝悌閣)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원래는 보호각이 없었습니다.
▼ 효제비의 표면에 수많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데, 글자의 수는 173자이며, 연산군 3년(1497년)에 세워졌습니다.
이 효제비는 원래 예당저수지 수역(개뱅이다리 옆)에 있었으나, 1978년 대흥면사무소(지금의 동헌)앞에 옮겨졌습니다.
[자료 : 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효제비의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석한 내용을 알아 보겠습니다
※ 금석문에서 보면 태종 18년(1418)에 지신사 하연이 전국에 효자, 효부들을 찾아보라는 공문을 내렸는데, 충청도 대흥군에서 이성만, 이순형제의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를 보고 받으시고, 불러서 상을 내렸으며, 연산군 3년(1497)에는 효제비가 세워졌다는 내용입니다.
영락 16년[1418] 11월 3일, 지신사 하연(河演)이 삼가 왕지(王旨)를 받들어 ‘의리가 있는 남자와 절개가 있는 여자, 효성스런 아들과 손자를 찾아보고 보고할 일’로 각 도에 공문서를 보낸 일이 있다. 충청도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등은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봄과 가을로 부모가 사랑하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님의 무덤을 지키고 동생은 아버님의 무덤을 지키면서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나아가되 아침과 저녁으로 서로 맞잡고 같이 밥을 먹었고, 한 가지 맛난 것을 얻으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고 임금께 상신(狀申)을 올려 보고드렸다. 앞서 효자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등을 임금께서 궐내로 불러 정표문려하시고,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삼가고 지켜서 가풍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 하시고 영세토록 전하는 교훈이 되게 하셨다. 홍치(弘治) 10년[1497] 정사 2월 일 세우고 표하다.” |
▼ 의좋은형제 효제비가 있었다는 개뱅이다리(가방교)는 예당호수로 수몰되기 전에 해체하였는데, 포털지도와 자료사진으로 위치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 [자료사진:충남도청] 예당저수지가 물에 잠기전의 1962년의 모습입니다_5번이 개뱅이다리(가방교)입니다.
▼ 효제비 왼쪽 사진의 각서(刻書)가 안 보여서 각서가 잘 보이는 오른쪽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어렸을 적에 책에서 읽었던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가 실제로 대흥면에서 있었던 것을 동상으로 대흥면사무소 앞에 세웠습니다
이성만·이순 형제의 유명한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흥 윗들거리에 사는 형과 오리골에 사는 동생이 서로에게 더 많은 벼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에 밤마다 몰래 가져다주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밤 개뱅이다리(가방교)에서 마주쳐 밤마다 자기 집 가마니가 늘어나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관아의 문은 형태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솟을대문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조선 후기 때에는 대부분 누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임성아문(任城衙門)은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대흥현의 관아에는 십여채의 집무실이 있었는데, 동헌, 서헌, 아전들의 방, 포도청,등등이 하나의 담장안에 있었고, 그 담장의 중앙에 또 다른 큰 누각문이 있었다는것입니다.
▼ 대흥동헌의 삼문을 임성아문이라는 설명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 지금의 임성아문을 동헌의 내삼문으로 보는 이유는 아래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알게 됩니다.
비교사진은 온양의 온주아문인데, 아문의 품격자체가 비교가 안됩니다. 조선후기에 대부분의 관아 아문은 2층 누각으로 바뀌었습니다.
▼ 조선후기에 그려진 대흥군지도에서 보더라도, 아문이 2층 누각입니다.
▼ 조선후기에 제작된 [1872년지방지도]의 대흥군지도에서 보면, 관아의 건물들이 최소 15채 정도가 보이는데, 지도는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그려져 있으며, 봉수산(鳳首山) 아래에 여러 가지 관아의 부속건물들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자료에서 관아에는 무슨 건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구동헌(9칸)
- 신동헌(16칸)
- 남상방(4칸)
- 북상방(5칸)
- 대청(6칸)
- 초당(5칸)
- 행랑(7칸)
- 서헌방(16칸)
- 객사정청(3칸)
- 객사동헌(12칸)
- 하마대(4칸)
- 은사정(14칸)...
▼ 부여 홍산관아의 복원된 모습을 보면 동헌앞에 솟을대문의 삼문이 보이고, 그 앞에 누각으로 된 아문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임성아문은 동헌의 출입문이었다라고 추정이 됩니다.
▼ 이런저런 이유없이 "임성아문"이 딱 이정도만 됬으면 ...(양주관아의 양주아문에 임성아문 현판을 합성해 봤습니다)
▼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안내판인데, 동헌 뒤에는 척화비와 화령온주 태실이 있다는 안내그림입니다.
▼ 임성아문(任城衙門)은 임성군 관아의 문이다라는 뜻이며, 원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이었던 것에서 통일신라 경순왕 때 존(存) 자를 빼고 임성군(任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때에 대흥군으로 개칭이 되었는데, 어찌 대흥아문(大興衙門)이라 하지 않고, 통일신라 때의 지명인 임성아문(任城衙門)이라고 하는지 긍금합니다.
▼ 대흥동헌은 현재 동헌 건물과 동헌의 문인 아문만 남아 있습니다만, 원래는 내아(內衙)라고 하는 서헌(西軒)이 옆에 있고, 각종 부속건물들이 많아야 하는데,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 관아의 건물을 경찰서, 헌병대등에서 뺏어 쓰면서 거의 헐렸다고 봐야 합니다.
▼ [자료사진] 대흥동헌을 공중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대흥동헌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고, 1914년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흥면사무소로 개조하여 사용되다가 면사무소는 동헌 옆으로 이전하면서 1979년에 해체복원 정비되었습니다.
대흥동헌은 예산지역에 현존하고 있는 유일한 관아건물이며, 1405년에 건립된 대흥향교와 함께 건축물로서 역사적·건축학적의 가치가 있습니다.
▼ 동헌의 북쪽 즉 지금의 면사무소자리가 서헌(내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동헌의 뒤편에는 영조의 화령온주 태실과 척화비가 있습니다.
▼ 임성아문을 나서며, 바라보는 큰길입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도 이 길은 그대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관아의 아문은 아마도 50~60미터 정도 앞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충남충북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산_송시열유적(화양동) (0) | 2023.09.13 |
---|---|
예산_대흥 척화비(大興 斥和碑) (0) | 2023.09.06 |
예산_덕산 읍내리미륵불 (0) | 2023.09.03 |
예산_신평리돌미륵 (0) | 2023.09.02 |
예산_신리 법륜사 마애약사여래입상 (0) | 2023.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