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은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쌍릉이며, 동원상하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위에 효종의 능침에는 곡장이 있지만,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장이 없고, 봉분에는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봉분 앞까지 가서 볼 수 있는 왕릉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북쪽으로 있는 효종대왕릉 입니다.남쪽으로 있는 세종대왕릉은 능침을 제외한 모든 곳이 공사로 인하여 출입금지 지역입니다.
▼ 자료사진들을 배치그림과 같이 올려봅니다만, 인선왕후의 곡장은 없는데 자료그림이 잘못됬습니다
▼ 조선17대 국왕 효종의 가계도입니다. 효종도 아들이 현종 한분밖에 없이 공주만 6분을 두셨는데, 첫째공주는 일찍 죽었습니다.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독살되어 나이 31에 즉위하여 10년동안 북벌정책으로 나라의 기틀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나이 41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왕은 장자 즉위 원칙인데, 대부분 왕자의 생산에 적극적이지 않았는지 왕자가 귀했습니다
- 효종의 생애이야기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간 머물렀다. 귀국 후인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 능의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 능의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 효종의 영릉에 가는길에 영릉재실이 있습니다. 물론 세종의 영릉에도 재실이 있지만, 장기간의 공사로 인하여 출입금지 상태입니다. 효종 영릉의 재실은 주위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냥 막 지나치기가 너무 아쉬운 곳입니다.
▼ 조선 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능인 영릉(寧陵)에 제사하기 위해 1674년(현종 15)에 세운 재실(齋室)로 재실중 유일한 보물 제1532호 입니다. 재실은 능을 수호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며, 제관들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릉 재실은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효종의 재실은 두번의 이전을 하게 되는데, 효종의 능은 본래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서쪽 산기슭인 원릉 자리에 조성되었었습니다. 1659년 5월 9일(현종 원년)에 산릉도감이 꾸려지고 6개월의 공사를 거쳐 그 해 10월 29일에 산릉의례가 거행되었고. 재실은 7월 2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6일에 상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산릉을 조성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석물이 벌어지고 현궁까지 물이 침투할 것을 염려하여 1673년(현종14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고 재실도 그대로 이건하였다. 재실은 이듬해인 1674년(현종15년)에 인선왕후를 합장하면서 다시 한 번 자리를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이전된 재실이 현존 재실로 추정됩니다.
▼ 효종의 재실은 조선왕릉의 재실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재실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조선왕릉의 재실중에서 주위의 풍경들이 가장 아름다운 재실입니다.
▼ 솟을대문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 행랑채안으로 들어와서 보는 모습입니다. 행랑채는 집사방, 창고, 마굿간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재실앞마당의 모습들입니다. 재실앞의 회양목은 수령 3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재실앞의 커다란 나무는 수령이 엄청오래되어 보이는 나무인데, 오래된 재실과 어울립니다.
▼ 재실건물입니다.
▼ 여주의 영릉은 일반 관광객들도 많지만, 왕릉의 역사를 알아보려는 사람들도 만이 찾는 곳 입니다.
▼ 재실과 담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안향청과 제기고등이 있는듯 합니다.
▼ 향을 보관하고 관리 하던 향대청입니다.
▼ 제기들을 보관하던 제기고 입니다.
▼ 우물이 있고, 문으로 나가면 효종의 영릉으로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 재실 빆에서 보는 모습니다.
▼ 효종의 영릉 홍살문 앞에 왔습니다.
▼ 효종영릉의 배위는 다른 왕릉(전돌)과 달리 박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 조선왕릉의 배위는 이런 모습이 원래의 모습인듯 합니다.
▼ 효종의 영릉은 금천이 홍살문을 지나서 있습니다. 아마도 왕릉조성할때 지형적으로 배수로를 홍살문 안쪽으로 둘 수 밖에 없었을것입니다.
▼ 배수로가 깊고 넓게 파져 있으며, 돌로 만든 물길은 튼튼하게 보입니다. 건물은 수복방입니다.
▼ 왼쪽의 수라간입니다
▼ 금천교의 교각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인듯 합니다.
▼ 정자각앞으로 갑니다만, 조선왕릉의 모든 건물들은 모양이 거의 비슷합니다.
▼ 효종영릉의 정자각 동계에는 특이하게 어계가 2개이고 가운데에는 운계가 있습니다.
▼ 운계의 문양은 꽃모양처럼 보이고, 비교적 깨끗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계가 하나 더있습니다. 보통은 운계와 어계가 하나씩만 있는데, 어계가 운계를 사이에 두고 있는 모습인데, 효종의 영릉에서만 있는듯 합니다
▼ 정청안에 침상은 두분의 혼령이 모시므로 두개가 있습니다.
▼ 정자각 뒤로는 신도가 사초지까지 놓여져 있고, 축문을 태우는 예감의 모습도 보입니다.
▼ 비각 뒤에서 보는 인선왕후 능침이며, 정면으로 올라 갈 수는 없습니다
▼ 표석의 참고자료사진을 올렸습니다.
▼ 표석의 받침대입니다만, 문양이 아주 아름답습니다.이처럼 표석의 받침석이 아름다운 왕릉은 별로 없습니다.
▼ 효종영릉의 능침은 개방되어 있는데, 왼쪽으로 올라갑니다.
▼ 먼저 인선왕후 능침입니다. 봉분의 모습과 난간석, 석수등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인선왕후 윗쪽에 자리잡은 효종의 능침입니다.
▼ 다음은 여주에 묘가 있지는 않고 남양주에 있지만 , 효종의 후궁이었던 안비의 묘인 안빈묘(安嬪墓))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묘를 보면 왕자나 후공의 묘제에 맞게 조성이 되었습니다만, 상석 옆에는 양쪽으로 동자가 서있는 것이 다른점입니다.
제17대 효종 후궁 안빈묘(安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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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471-1 (송능리 산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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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의 형식 : 단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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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의 조성 : 1693년(숙종 19)
- 안빈묘의 구성
안빈묘는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 앞에 묘표석, 상석, 향로석, 혼유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을 배치하였다.
- 안빈묘의 역사
1693년(숙종 19) 음력 10월 23일에 안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음력 12월 5일에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 안빈 이씨(安嬪 李氏) 이야기
안빈 이씨(재세 : 1622년 음력 9월 6일 ~ 1693년 음력 10월 23일)는 본관이 경주인 이응헌의 딸로 1622년(광해 14)에 태어났다.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가자 심양까지 따라가 봉림대군을 모셨다고 한다. 효종이 즉위한 후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이 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숙용(淑容)을 거쳐 숙의(淑儀)에 봉작되었다. 그 후 귀인(貴人)을 거쳐 1686년(숙종 12)에 안빈에 책봉되었다. 효종 사이에서 1녀(숙녕옹주)를 낳았으며, 1693년(숙종 19)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안빈묘의 상석 옆에 작게 만들어진 문인석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 안빈묘 묘표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지묘"라고 써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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