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 있는 장릉(長陵)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으로 되어 있습니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하였습니다.

 

파주 장릉은 천장하면서 옛 장릉의 석물과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 이라 합니다. 인조는 조선국왕중에서 제일 무능한 왕으로 꼽자면 Worst-1인 정말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외교를 잘못하여 두번씩이나 금수강산을 오랑캐의 침략에 내주고, 후궁의 계략에 넘어가 큰아들 소현세자를 독살(설)하고 세자빈도 죽이고, 손자들도 후한을 없앤다고 제주도로 유배 보내서 죽여버린 정말 조선국왕 계보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왕이었습니다.

 

싸이코인 아버지 정원군(추존 원종)을 닮아서 부전자전 못된 짓은 다했던 왕이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파주장릉의 위치 지도입니다

▼ 자료사진들을 올려봤습니다.

 

▼ 인조의 가계도를 보면 후궁중에서 귀인조씨가 보이는데, 인조에게 소현세자를 헐뜻고, 독살에 관여하고, 세자빈까지 모함하여 죽였던 못된 후궁이었지만, 인조가 무능하여 후궁의 치마폭에 빠져서 정사를 그르친 나쁜 왕이었습니다,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17대 효종에 등극하자, 사약을 받고 처단된 못된 후궁이었습니다.


장릉長陵(인조와 인열왕후)

위치 :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능의 형식 : 합장릉
능의 조성 : 1636년(인조 14), 1649년(효종즉위), 1731년(영조 7)
장릉(長陵)의 구성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이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특히 옛 장릉의 석물과 천장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금천교,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변로를 깔았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혼유석은 합장릉의 형태로 2좌를 배치하였다. 특히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장릉(長陵)의 역사

1635년(인조 13)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36년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공사하였다. 이후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인조(仁祖) 이야기

인조(재세 : 1595년 음력 11월 7일 ~ 1649년 음력 5월 8일, 재위 : 1623년 음력 3월 13일 ~ 1649년 음력 5월 8일)는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선조 28)에 임진왜란으로 피란 중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이 되었으며 이후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에 서인 정권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즉위 초에 반정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수습하였고, 당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성장하는 시기를 인식하지 못하여 척화파와 주화파가 대립하기도 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다시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으나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수난을 당하였다. 그 후 1649년(인조 27)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묘호를 열조(烈祖)라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묘호를 인조라 하였다.

인열왕후(仁烈王后) 이야기

인열왕후 한씨(재세 : 1594년 음력 7월 1일 ~ 1635년 음력 12월 9일)는 본관이 청주인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회산부부인 황씨의 딸로 1594년(선조 27)에 강원 원주 내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에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에 봉해졌으며, 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조 사이에서 6남 1녀를 낳았으며, 1635년(인조 13)에 창경궁 여휘당 산실청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 파주장릉의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매표소를 지나면 곧바로 재실에 들르게 됩니다.

 

▼ 재실 대문앞에 보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말에서 내릴때 발을 놓는 받침돌인듯 합니다.

 

▼ 재실에는 2명의 관리(영과, 능참봉)들이 상주하였다고 합니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보는 재실의 전사청입니다,

 

▼ 향을 보관하던 안향청인듯 한데, 건물의 이름과 용도를 알 수 있게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넓다란 재실을 예전에는 관리소로 이용했었는데, 지금은 비워두고 관리만 하는데, 건물이라는 것이 비워두면 더 빨리 썩거나, 무너지는 것인데, 재실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검토해보는것이 어딸까 하는 생각입니다.

 

▼ 행랑도 복원하여 깔끔합니다. 재실은 단청을 하지 않는데, 수복방과 수라간은 단청을 한 왕릉도 더러 있습니다

 

▼ 빗물이 빠지는 도랑위에 담장을 수리하면서 받침돌을 세워놓은 재치가 보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 재실을 나와서 능으로 가는길입니다. 가을은 벌써 왕릉에도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 금천교를 건너서 홍살문앞으로 갑니다.

 

▼ 기본적인 건물들은 다 있는 상태입니다.

 

▼ 장릉의 안내문을 천천히 보면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등이 있었는데, 그냥 광해군이 계속 있었으면 인조 보다는 훨씬 정치를 잘 했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향로,어로,변로가 잘 복원되어 있는 장릉입니다

 

▼ 일부러 만들기도 어렵게 보이는 소나무 입니다.

 

▼ 단청을 하지 않은 수라간입니다.

 

▼ 단청을 한 수복방입니다. 단청을 하지 않은 다른 왕릉의 수복방도 가끔은 보입니다

 

▼ 정자각의 여러모습의 사진들입니다. 다른 왕릉과 다른것은 없습니다

 

▼ 동계의 운계(향계)는 꽃문양입니다.

 

▼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사초지에서 부터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 파주장릉의 자료사진으로 능침의 석물들을 알아 보았습니다

 

▼ 망주석의 왼쪽과 오른쪽의 세호모습을 자세히 보니, 왼쪽의 세호는 모양도 자세하게 보이는데, 오른쪽의 세호는 무양이 깨져 있고 보통은 왼쪼과 오느쪽의 세호가 가는 방향이 서로 틀린데, 전부 하늘로 보고 있습니다.

 

▼ 문인석과 무인석의 자료사진을 하나씩 골라서 석마와 함께 꾸며 보았습니다.

 

▼ 석양과 석호를 동쪼과 서쪽에서 하나씩 골라서 꾸며 보았습니다.

 

▼ 보통의 능에는 석양과 석호가 4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전부 얼굴 모습만 자료사진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 정전의 문에서 능침으로 이어지는 신교와 신로는 사초지까지 이어졌습니다. 왕릉을 설계하던 분들의 세밀함에 능에 잠들어 있는 능주들의 마음도 흡족할 것입니다.

 

▼ 정자각의 방풍널 사이로 보이는 홍살문과 향로의 모습으로 여기가 신성한 곳으로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 기둥에는 수없이 많은 구멍이 보이는데, 벌들의 구멍인지, 아니면 벌레들의 구멍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치가 필요한듯 보입니다.

 

▼ 예감을 보면 둘레석에 구멍이 보이는데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습니다.

 

▼ 비각의 모습입니다.

 

▼ 표석의 전면/후면 자료사진입니다.

 

▼ 표석의 번역문을 보면 능주의 생애가 보입니다.

 

 ▼ 왕릉을 둘러보고 나서는데 가을빛이 곱기만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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