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 있는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의 능과 원비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으며, 동원이강릉으로 능침이 따로 되어 있습니다. 광릉수목원이 있는 곳과 이웃하고 있는 자연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왕위찬탈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만 보면 몸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운 왕이었지만, 잠들어 있는 지역은 숲이 너무 잘 가꾸어져 있어서 시민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광릉의 상설배치도(문화재청)인데, 홍살문에서 정자각 까지 참도(향로와 어로)가 있는것으로 되어 있는데, 광릉은 참도가 없습니다. 문화재청 자료는 잘못되어 있는 자료 입니다.
- 광릉의 구성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침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향로와 어로는 유실되어있는 상태이다. 본래 정자각은 세조의 능역 앞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두 능의 사이로 옮겨 지은 것이다.
- 광릉의 역사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주엽산(지금의 죽엽산) 아래에 광릉을 조성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하는 일부 풍수가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1483년(성종 14)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 세조(世祖) 이야기
세조(재세 : 1417년 음력 9월 29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 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에 진평대군에 책봉되었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이 즉위 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 즉위 후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상왕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1468년(예종 즉위)에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정희왕후(貞熹王后) 이야기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에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 광릉문화관에 먼저 들렸습니다. 여러가지 자료를 보고 나면 광릉에 대한 이해가 많이 됩니다.
▼ 세조의 가계도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수양대군 이전에는 진평대군이라고도 하였으며, 음악과 병서에 밝았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 의경세자는 아들이 월산대군과 자을산군등 2명이었으며, 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자료사진은 세조의 능입니다.
▼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그 왕의 자리를 보존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내인 정희왕후에 대한 지아비의 예는 다 하였던 듯 합니다. 후궁이 한명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왕릉을 조성하는데 석실로 만드는데 대한 백성들의 노고와 비용을 줄이려 유언으로 회격실 무덤으로 만들고, 병풍석을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만, 후세의 왕들이 그 유언을 잘 따르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 조선은 왕릉의 거리 기준이 도성밖 10리에서 100리 이내에 능을 쓰도록 했는데, 광릉은 60리하고 하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10리는 5.4km였으니 광릉은 동대문밖에서 3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셈입니다.
▼ 능관리을 하는데, 능참봉이 2명이 있다고 합니다. 유교시대인 조선에서 능참봉은 책임이 막중하였던 것 같습니다.
▼ 왕릉의 재실은 구조가 거의 비슷합니다. 사진으로 몇장 올립니다.
▼ 왕릉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마비입니다. 현재 위치가 옛날에는 재실의 입구였던 것 같습니다.
▼ 최초의 광릉은 세조의 능으로 1468년에 조성 되었으며, 15년후 1483년 정희왕후의 능이 조성되었습니다. 왕비의 성씨를 보면 유난히 윤씨가 많이 보입니다.
▼ 다른 왕릉보다도 숲이 많이 우거져 있는 광릉입니다. 무심히 보면 잘 모르겠지만, 광릉에는 홍살문을 지나서 정자각까지 가는 참로(향로와 어로)가 없는 왕릉입니다. 조선왕릉중에서 유일하게 광릉에만 향로와 어로가 없고, 또한 배위도 없습니다.
▼ 동원이강릉의 광릉의 모습입니다. 왼쪽이 세조,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침입니다. 정자각까지 가는 향로와 어로가 없습니다.
▼ 수라간이나, 수복방은 최근에 복원이 된듯 합니다.
▼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 정자각의 정청에서 능침으로 통하는 신교가 다른 왕릉보다는 다르게 보입니다.
▼ 운계의 소맷돌 문양은 거의 마모가 된듯 합니다,
▼ 비각모습입니다. 비각 윗쪽은 정희왕후의 능침입니다. 능침은 출입금지입니다.
▼ 자료사진의 표석(점면/후면)입니다
묘표 전면 : 조선국 세조대왕 광릉 정희왕후부좌강
묘표 후면 :
세조 혜장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은 명나라 영락 15년인 정유년(태종17, 1417) 9월 29일에 탄생하였다. 선덕 3년인 무신년(세종10, 1428)에 처음으로 진평대군에 봉해졌다가 후에 봉호를 함평대군으로 고쳤고,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수양대군으로 고쳤다.
경태 6년인 을해년(단종3, 1455) 윤6월 11일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성화 4년인 무자년(세조14, 1468) 9월 7일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같은 달 8일에 승하하였다. 이해 11월 28일에 양주 동쪽 주엽산 직동 자좌(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재위가 14년이고 향년은 52세이며 명나라에서 ‘혜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 자성 흠인 경덕 선열 명순 원숙 휘신 혜의 신헌 정희왕후 윤씨는 영락 16년인 무술년(태종18, 1418) 11월 11일에 탄생하였다. 선덕 3년인 무신년(세종10, 1428)에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지고, 경태 6년인 을해년(세조1, 1455)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화 19년인 계묘년(성종14, 1483) 3월 30일에 승하하여 6월 12일에 세조대왕의 능 왼쪽 능선 축좌(북동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66세이다.
숭정 기원후 128년인 을해년(영조31, 1755) 2월 ○일에 세우다.
▼ 멀리서 보는 세조의 능침입니다.
▼ 멀리서 보는 정희왕후의 능침입니다.
▼ 능침에는 올라가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료사진을 꾸며서 올려봤습니다.
▼ 예감이 많이 묻혀있어서 살짝 보입니다.
▼ 왕릉의 보존을 위해서 대부분의 능침은 출입이 안되다 보니, 왕릉을 보는 재미가 덜합니다만, 이정도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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