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홍릉과 유릉 능역에는 대한제국 황제와 황손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능,원,묘가 있는데,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를 보고 왔습니다. 일반 원과 묘는 산책길 주위에 있어서 출입에 제한이 없이 아무때나 볼 수 있습니다. 영원에서 나와서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 그림지도 입니다만, 다른 후궁묘는 개방이 안되어 있습니다
▼ 길옆에는 조선왕조 왕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사진과 가계도,왕릉 위치도가 있는 패널을 하나하나 보면서 갑니다.
▼ 대한제국 황실가계도를 잠시라도 보고 가면 묘의 주인에 대한 핏줄을 알게 됩니다.
▼ 따로 설명이 필요없이 안내판을 잘 읽어 보면 의친왕의 생애와 묘의 이장이력을 알 수 있습니다.
▼ 젊은 시절에는 키가 작았던 동생, 영친왕 보다는 10살이나 많았지만 훤칠한 미남이었습니다.
▼ 의친왕의 정복(대례복)차림 사진과 의친왕비 김씨의 사진입니다. 아쉽게도 김씨와의 사이에는 자손이 없었습니다만, 후비사이에서는 13남 9녀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가수 이석씨가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입니다.
▼ 고종의 황족들의 가족사진에 인물의 이름을 적어 보았습니다. 의친왕은 군복차림입니다.
▼ 대한제국 황족들의 기록사진들을 보고 나서 의친왕과 덕혜옹주묘 묘역을 지키는 초소를 지나갑니다.
▼ 먼저 의친왕묘를 들립니다.
▼ 의친왕묘에 대한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보겠습니다.
- 의친왕묘의 역사
의친왕묘는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의 묘소이다. 합장의 형태로 조성하여 묘소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1955년에 의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양주 화양리(현 성동구 화양동)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964년에 의친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홍유릉 권역 밖(현 외재실 근처)에 의친왕과 따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1965년에 의친왕묘가 어머니 귀인장씨의 묘와 함께 서삼릉 권역으로 이장되었고, 1996년에 서삼릉 권역에 있던 의친왕묘와 홍유릉 권역 밖에 있던 의친왕비묘소를 덕혜옹주묘소 동쪽으로 이장하고 합장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 의친왕(義親王) 이야기
의친왕(재세 : 1877년 음력 3월 30일 ~ 1955년 양력 8월 16일)은 고종과 귀인 장씨의 아들로 1877년(고종 14)에 태어나, 1891년(고종 28)에 의화군에 봉해졌다.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명으로 미국유학을 하였고, 이듬해인 1900년에 의친왕에 책봉되었다. 1905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조국의 광복에 힘썼다. 한편 대동단 간부들과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의해 실패되었고,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였다.
1945년 광복 후 평민의 신분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5년에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비(義親王妃) 이야기
의친왕비 김씨(재세 : 1881년 양력 12월 22일 ~ 1964년 양력 1월 14일)는 본관이 연안인 김사준의 딸로 1881년(고종 18)에 태어났다. 1893년(고종 30)에 의화군과 결혼하여 연원군부인에 봉해졌고, 1907년(융희 1)에 의친왕비에 책봉되었다.
의친왕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한일합병조약(1910), 광복(1945),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64년에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묘는 합장묘입니다. 혼유석 앞에 단이 보이는데, 아마도 왕릉의 혼유석이라는 개념보다는 제를 지낼때 음식물을 올려 놓는 상석의 개념인듯 합니다.
▼ 다음은 홍유릉 후궁묘역에 있는의친왕 후실들의 묘를 알아보겠습니다. 자료에는 의친왕 후실이 13명이 있었는데, 제1후실이 수관당 정씨, 제2후실이 수인당 김씨였습니다. 자료사진을 보면 수관당의 묘는 나름대로 장명등과 묘표가 보이는데, 수인당의 묘는 일반인의 묘와 같은 모습입니다. (후궁묘역은 비공개지역입니다)
- 수관당 정씨는 의친왕의 첫째 후실이며, 장남 이건(李鍵)을 낳았습니다, 의친왕의 정비 덕인당 김씨의 자손이 없었으므로, 수관당 정씨의 아들 이건이 장남이 됩니다. 이건은 일본군인이 되었다가, 일본에 귀화했습니다.
- 수인당은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흥인이며, 의친왕 사이에 3남을 두었는데, 이우(李鍝), 이주(李澤),이곤(李錕)입니다. 3남중에서 이우(李鍝)의 행적이 흥미로운데, 아버지 의친왕과 같이 일제에 저항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1912년 출생하여, 1945년8월에 일본에서 원폭에 의해서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당시는 일본육군 중좌였습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기 위해 저항하여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습니다. 1945년8월15일에 경성에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덕혜옹주의 묘를 보기전에 산책길 옆에 걸려 있던 사진들을 먼저 보겠습니다. -
▼ 덕혜옹주의 유치원이었던 덕수궁의 준명당입니다.
▼ 왼쪽이 덕혜옹주이고, 오른쪽의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군지 좀더 알아보겟습니다.
- 묘의 구성
덕혜옹주묘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묘소이다. 덕혜옹주묘는 단묘의 형태로 상설은 의친왕묘와 같으나 의친왕묘와 달리 표석을 설치하였다. 표석에는 ‘대한 덕혜옹주지묘’라고 써있다.
- 묘의 역사
1989년에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영원 동쪽 언덕에 묘를 조성하였다.
- 덕혜옹주(德惠翁主) 이야기
덕혜옹주(재세 : 1912년 양력 5월 25일 ~ 1989년 양력 4월 21일)는 고종과 귀인 양씨의 딸로 1912년에 덕수궁(경운궁)에서 태어났다. 1921년에 덕혜옹주의 칭호를 받았고 1922년에 심상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925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신경쇠약의 증세가 보이기 시작되어 조현병의 진단을 받았다. 1931년에 대마도주의 후손 종무지와 정략결혼 후 딸(정혜)을 낳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병상생활을 하였다.
결국 1955년에 종무지와 이혼하였으며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62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얻어 귀국 후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실어증과 노환으로 여러 차례 치료를 받다가, 1989년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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