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 있는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대한제국의 1대 고종(홍릉)과 2대 순종(유릉)이 잠들어 있고 또한 대한제국의 왕족들이 모여서 잠들어 있는 곳 이기도 합니다. 먼저 들려 본 곳은 홍릉과 유릉의 역사문화관이며, 재실과 유릉을 들려 보았습니다. 남양주 홍릉,유릉에는 다른능에서는 못보던 외재실이 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홍릉과 유릉의 배치도를 보면 황제가 아닌 왕족들의 무덤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수인당묘,수관당묘,귀인장씨묘만 제외하고 전부 들려보았습니다. 붉은 네모선이 유릉 묘역입니다.

 

 

 

▼ 홍릉,유릉을 찾던 날이 한가위 연휴여서 무료 입장이었습니다.

 

▼ 매표소 맞은편에는 홍릉,유릉 역사문화관이 있는데, 역사문화관이 있는곳 있고, 없는곳도 있습니다. 고종과 순종의 가계도를 보면 순종이 황제 자리를 물려 받기는 했는데, 순종이 후사가 없습니다.

 

▼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애와 홍릉의 조성되는 과정을 년도별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 명성황후의 능이 처음에는 청량리에 있었습니다. 청량리의 홍릉에는 지금도 영휘원과 숭인원이 남아 있으며, 영휘원은 고종의 후비 엄귀비(영친왕 모친)의 묘이며, 숭인원은 영친왕의 아들 이진의 묘입니다. 청량리 홍릉이 원래의 황실 가족묘지였습니다.

 

▼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생애와 유릉의 년도별 조성과정의 그림입니다

 

▼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능은 하나의 봉분안에 세분을 함께 모신 동봉삼실합장릉이며, 조선왕릉중 유일합니다.

 

▼ 역사문화관을 나와서 홍릉,유릉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황제의 능역이라 문도 틀립니다.

 

 

▼ 먼저 유릉의 재실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 유릉 재실은 순종황제의 유릉 재실입니다.

 

▼ 유릉(裕陵)은 27대 순종의 능입니만, 능침이 하나밖에 안 보이지만, 한봉분안에 세분이 합장되어 있는 동봉삼실 합장릉입니다

 

▼ 순종의 가계도 입니다. 너무 허전하게 보이는데, 순종은 남자로서의 생식능력이 원래 부터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족에서 흔히 보이던 양자도 없었습니다.

 

- 능의 구성

유릉은 대한제국 2대 순종효황제와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와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능이다. 유릉은 합장릉의 형태로 한 봉분 안에 세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 합장릉의 형태이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선왕릉을 계승하고 명나라의 황제릉을 인용한 대한제국의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좁지만, 석물의 조각이 사실적이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제향공간에는 침전, 석물, 비각, 홍살문을 세웠다. 비각에는 1개의 능표석이 있는데 ‘대한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써있다.

 

- 능의 역사

처음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광무 8)에 세상을 떠나자, 양주 용마산(현 어린이대공원)에 유강원(裕康園)을 조성하였다. 순종이 등극한 후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봉되었으며, 순종이 1926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산에 있던 유릉을 홍릉 동쪽 언덕으로 천장하는 것이 결정되고 산릉공사를 하였다. 이후 순명효황후를 먼저 모시고, 순종을 합장으로 모셨다. 그 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나자 유릉에 합장으로 장사되었다.

 

-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이야기

순종효황제(재세 : 1874년 음력 2월 8일 ~ 1926년 양력 4월 25일, 황재위 : 1907년 양력 7월 19일 ~ 1910년 양력 8월 29일)는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74년(고종 11)에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바로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광무 11)에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등극하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등극 후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었고, 1909년(융희 3)에는 기유각서가 강제 체결되어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1910년(융희 4)에 친일파에 의해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양력 4월 25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재세 : 1872년 음력 10월 20일 ~ 1904년 양력 11월 5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은부원군 민태호와 진양부부인 송씨의 딸로 1872년(고종 9)에 양덕방 계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광무 1)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순종 등극 전인 1904년(광무 8)에 경운궁(덕수궁) 강태실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7년(융희 1) 순종 등극 후 순명황후로 추존되었다

 

-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이야기

순종의 두 번째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재세 : 1894년 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본관이 해평인 해풍부원군 윤택영과 경흥부부인 유씨의 딸로 1894년(고종 31)에 양근 서종면 외가(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1907년(광무 10)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에 순종이 등극하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는 한일합방체결을 반대하여, 병풍 뒤에서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어전회의를 듣고 있다가 백부 윤덕영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결국 1910년(융희 4) 한일합병조약 체결되면서 이왕비(李王妃)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행위를 경험하였고,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었어도 대한제국의 황후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생활하였다가 1966년 양력 2월 3일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창덕궁에 남아있었는데, 이때 인민군들이 창덕궁에 들이 닥쳐 행패 부리는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 재실앞에는 우물이 보이는데, 덮개로 덮혀 있습니다. 어정으로 보입니다.

 

▼ 유릉의 재실은 규모가 아주 크게 보입니다. 건물을 보면 마치 덕수궁의 준명당과 즉조당을 보는듯 합니다.

 

▼ 단청을 칠하면 영락없는 궁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유릉의 재실에는 특이한 길이 보입니다. 향로와 어로입니다. 저 문을 나가면 유릉의 침전의 옆으로 오르는 계단에 다다릅니다.

 

▼ 유릉 홍살문 앞에서 재실 바라봅니다. 재실에서는 능의 관리 제사등을 관장하는 능지기가 거주 하는 곳 이라고 합니다.

 

▼ 유릉의 안내판입니다.

 

▼ 지금까지 보던 왕릉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황제의 능입니다. 보기가 좀 어색한 느낌이 옵니다. 금천교와 홍살문, 수복방만 익숙한 모습이고, 나머지 석물과 일자각의 모습은 낮섭니다.

 

▼ 홍살문 앞에서 일자각 침전을 바라보면 가운데 향로가 있고, 어로는 좁게 향로 양옆으로 있습니다. 보통 왕릉의 베위는 홍살문 오른쪽에 있는데, 유릉은 배위가 왼쪽에 있고, 홍살문 보다 앞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입니다.

 

▼ 향로가 가운데, 어로가 양옆으로 있습니다. 오로인지 변로인지 구분이 안되는 모습입니다.

 

▼ 유릉의 향로와 어로의 모양을 잘 보기 위해서 자료사진을 올려봤습니다. 홍살문를 지나서 향로와 어로가 있고, 또 재실에서 나온 어로가 수복방앞과 비각앞을 지나서 일자각 측면 동계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 유릉에는 수라간이 안보이고, 수복방만 있습니다.

 

▼ 재실에서 물을 길어 쓰던 제정입니다

 

▼ 홍살문 안쪽으로 이상한 돌이 나란히 두개가 박혀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료를 찾아보니, 차양천막을 칠때 지지 기둥을 박아놓는 돌이랍니다.

 

▼ 재실에서 침전으로 이어지는 어로인듯한데, 다른 능에서는 못 보던 길입니다.

 

▼ 유릉의 석수는 다른 왕들 무덤의 석수와는 완전히 틀립니다. 낙타, 코끼리, 용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 말은 그닺 거부감이 없는데 다른 석수들은 동남아 지방의 동물을 보는듯 합니다.

 

▼ 문석인, 무석임의 모습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되었습니다.

 

▼ 침전앞의 운계(신계)는 가운데 있고, 어계는 양옆으로 있는점이 좀 특이합니다. 저런 계단은 침전 양옆으로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 침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제수진설도를 보면 일반 다른 왕릉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제사음식을 올려놓은 탁자는 금색입니다.

 

▼ 침전앞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담아 보있습니다.

 

▼ 비각에도 들려 봅니다.

 

▼ 세분의 묘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측면에도 대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 침전 왼쪽계단의 운계와 어계의 모습입니다.

 

▼ 침전 오른쪽 계단의 운계와 어계의 모습입니다.

 

▼ 고종의 홍릉으로 가면서 석물들을 담아봅니다.

 

▼ 능침으로는 올라가서 볼 수 없으므로 자료사진으로 대신 알아보겠습니다. 능앞에는 석물들이 없어서 좀 허전해보이기는 하지만,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등을 둘러서 최고의 치장을 했습니다.

 

▼ 혼유석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다른 왕릉들은 합장을 하면 혼유석을 두개 놓은데, 유릉은 동봉삼실합장릉인데도 혼유석을 하나만 놓았습니다.

 

▼ 재실앞을 지나서 고종의 홍릉으로 길을 갑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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