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서울 선릉과 정릉 중에서 11대 중종의 능이 있는 정릉(靖陵)입니다.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이 같이 있는 경우지만, 중종은 원비나,계비와 떨어져서 혼자 있습니다.

 

원래는 문정왕후(태릉)가 먼저 승하한 중종과 같이 묻히려고 하였으나, 능의 지대가 낮아서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서 명종이 태릉에 모셨다고 합니다.그래도 아버지(성종)와 어머니(정현왕후) 곁에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정릉은 언뜻보기에도 지대가 낮아보입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풍수지리 때문에 죽어서도 같이 잠못드는 기구한 왕족들이었습니다.

 

-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왕 한분을 모신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 능의 역사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논의하여, 중종의 능침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장한 것이었으나,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던 자리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 중종(中宗) 이야기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 연산군의 폭정에 일어난 반정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한 진성대군 중종의 가계도입니다. 즉 성종의 아들이며, 연산군의 12살 아래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런데 묘호를 중조라고 하지 않고, 그냥 중종이라고 한것이 의문스럽습니다.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서 인종에서 인조로 묘호를 바꿨는데 말입니다

 

 ▼ 향로와 어로 옆의 잔디밭으로 걸어 들어 갑니다. 요즘 왕릉의 잔디깍기가 한창이더니 정릉도 깔끔하게 단장되었습니다.

 

▼ 정면으로 바라보는 정자각이며, 다른 릉의 장자각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 빌딩숲에 포위된 중종의 능입니다.

 

▼ 정전 뒤로 바라보이는 능침의 모습입니다.

 

▼ 운계(雲階)에는 구름모양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보통 운계에는 구름문양이 새겨져 있기는 하는데, 없는 릉도 있습니다

 

▼ 능침을 당겨보았습니다

 

▼ 정릉의  자료사진으로 편집하여 보았습니다.

 

▼ 봉분에는 방풍석이 둘러져 있습니다.

 

▼ 예감을 교체하였는데, 기계로 너무 잘 다듬어서 그런지 거부감이 살짝 옵니다

 

▼ 지대가 낮아서 그런지 신교가 위태해 보이고, 신로도 낮게 이어집니다.

 

 

 

▼ 사초지에는 비둘기들이 가득합니다. 잔디깍기가 끝난땅에 떨어진 씨앗이라도 많이 있는것 같습니다

 

▼ 정릉의 표석과 뒷면의 음기(번역)내용을 올렸습니다

 

 묘표 - 음기(번역) :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
중종 공희 휘문 소무 흠인 성효대왕은 명나라 홍치 원년인 무신년(성종19, 1488) 3월 5일에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진성대군에 봉해지고 정덕 원년인 병인년(중종1, 1506) 9월 2일에 즉위하였다. 가정 23년인 갑진년(중종39, 1544) 11월 14일에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같은 달 15일에 승하하여 을사년(인종1, 1545) 2월에 고양 희릉에 장사지냈다가 가정 41년인 임술년(명종17, 1562) 9월 4일에 광주 선릉의 동쪽 능선 건좌(북서쪽을 등진 방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가 39년이고 향년은 57세이며 명나라에서 ‘공희’라는 시호를 내렸다.
숭정 기원후 128년인 을해년(영조31, 1755) 2월 ?일에 세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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