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조선 6대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남양주의 사릉(思陵)에 다녀왔습니다. 능의 형태는 단릉이며, 능과 정자각, 홍살문이 일직선으로 조성된 아담한 능입니다. 2018년 10월 현재 수라간과 수복방의 복원공사중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도로옆에 사릉의 입구가 보입니다. 입구 부터 소나무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 잘 만들어진 안내도 입니다. 왕릉의 안내판 대부분 그림의 크기에 비해서 글자가 작아서 잘 안보입니다.

 

 ▼ 매표소를 지나서 재실로 가는길에는 나무들이 많이 보이고, 소나무 육모장도 보이는데, 조선왕릉에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한 육모장이라고 합니다.

 

▼ 재실은 잠겨 있는데, 이런 경우는 재실을 관리 사무소로 이용중인것으로 압니다. 예전에는 재실을 관리사무소로 사용했는데,왕릉이 유네스코 등재 이후에는 관리사무실를 만들어서 사용하는곳이 많아졌습니다. 재실이라는 것이 능을 관리하는 기능이 있는 건물로서 빈번하게 사람들과 물건들이 들락거리는 곳인데, 막상 건물을 비워두는것이 좋은것만이 아니라는것이 좀 아쉽습니다.

 

▼ 아담하게 보이는 사릉입니다. 조선왕조를 보면 단종의 비 정순왕후처럼 비통한 마음으로 살다간 왕족들이 무수히 많다는것은 왕권을 빼앗거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 능의 구성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을 생략하였다.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능의 역사

정순왕후 송씨는 1521년(중종 16)에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소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선산(양주 군장리)에 조성하여 복위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셨고,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 정순왕후(定順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송씨(재세 : 1440년 음력 3월 12일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세종 22)에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인 1455년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책봉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측근세력들이 제거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뒤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 후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다.

 

 

▼ 단종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려면 아버지 문종때 부터 보는곳이 이해가 빠를것 같습니다. 문종이 늦게 얻은 아들이었습니다만, 단종은 너무 어린나이에 죽어서 자손이 없었습니다. 만약 자손(아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조가 그냥 놔두지 않았을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조선왕비들 중에서 가장 오래살다가 돌아가신분입니다. 82세로 승하하였습니다

 

 

▼ 사릉은 다른 왕릉에 비하면 좀 좁은 느낌이 드는 릉입니다. 현재의 사릉은 처음 부터 왕릉으로 조성한것은 아니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집(해주 정씨)의 선산에 무덤을 썼으며, 숙종24년에 복위되어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한 것입니다.

 

▼ 향,어로 양옆으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복원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족히 2년 정도는 기다려야 복원된 건물을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 비각과 표석, 비문입니다.

 

▼ 가까이서 담아보는 능침입니다

 

▼ 자료 사진들을 올렸습니다. 능의 석물은 대체로 아주 간소하게 세웠습니다. 봉분도 원(園;세자나 세자빈의 묘) 같이, 문석인만 있고, 무석인은 없습니다.

 

▼ 망주석를 자세히 보면 세호가 보이는데, 좀 이상합니다. 보통은 동쪼과 서쪽의 세호의 가는 방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데, 사릉(思陵)은 망주석의 앵쪽 세호가 모두 하늘쪽을 보고 오르고 있습니다.

 

▼ 사릉(思陵)의 석양과 석호는 한쌍씩만 세워져 있습니다.

 

▼ 석호의 얼굴 모습은 좀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 이제 정자각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둘러 보겠습니다.

 

▼ 사릉은 향로와 어로가 정자각 앞에서 끊어졌는데, 이렇게 정자각 앞에서 향로,어로가 끊어진 왕릉도 가끔 있습니다.

 

▼ 특이하게 뚜껑이 있는 예감입니니다. 원래는 모든 왕릉의 예감에는 덮개가 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동계(東階)의 운계(雲階)의 문양은 구름문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문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운계의 받침석이 있는 릉도 있고, 받침석이 없는 운계도 있는데, 운계를 만들때 돌의 크기에 따라서 운계의 받침대 유,무가 결정되었을것이라고 봅니다.

 

▼ 사릉을 떠나며면서 맑은 하늘을 보며 정순왕후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어땠을까 조금은 헤아려 봅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