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휘원(永徽園)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사친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소(園所)입니다.엄씨의 사진을 보면, 보통의 후궁같지 않은 얼굴이며, 풍체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한힉을 그은 여인이었습니다. 왕릉은 아니지만, 역사를 좀더 알아보는 뜻으로 이해를 하고자 알아 보았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고종의 후궁서열 첫번째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후손들을 표시한 고종의 가계도 입니다.


▼ 영회원과 숭인원은 (구)홍릉의 권역에 있습니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가 묻혔었으나, 나중에 남양주로 천장하면서, 홍릉근린공원으로만 남았습니다

- 영휘원의 구성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태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사친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원소이다. 원소의 구성은 조선시대의 원소제도의 형태를 따랐다.

 

영휘원 입구에는 재실이 있고,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안에는 원표석 1기가 있는데 ‘순헌귀비 영휘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뒤에는 어정이 남아 있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을 둘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을 배치하였다. 원의 형식으로 석양과 석호는 각 1쌍씩 배치하였고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 영휘원의 역사

1911년에 황귀비 엄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성황후의 홍릉(구 홍릉) 경내인 현재의 자리에 원소를 조성하였다.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이야기

순헌황귀비 엄씨(재세 : 1854년 ~ 1911년 양력 7월 20일)는 본관이 영월인 증 찬성 엄진삼의 딸로 1854년(철종 5)에 태어났다. 5살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시위상궁이 되었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 32세때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자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강체출궁을 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의 명으로 다시 입궁하여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조선의 국모를 살해할 정도로 거칠어진 일본의 압박에 고종은 매우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상궁이었던 황귀비는 며칠 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일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관으로 탈출시킨다.

 

치밀하고 대담하게 진행된 이 ‘아관파천’을 통해 황귀비의 성격과 지혜를 다소 짐작해 볼 수 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 된 후에 황태자(영친왕)를 낳았으며, 이후 귀인(貴人), 순빈, 순비를 거쳐 1903년(광무 7)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엄씨는 우리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경술국치 후 1911년에 덕수궁 즉조당에서 58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순헌(純獻) 궁호를 덕안궁(德安宮), 원호를 영휘원(永徽園)이라 하였다.

 

 

 

▼ 엄귀비의 영휘원은 자료사진를 보면 대체로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 제정도 있습니다.

 

▼ 자료사진을 보면 엄귀비의 제향일에 참도를 걸어가는 제관들의 모습입니다. 대략 조선왕릉의 제향 모습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영휘원의 자료사진을 꾸며 보았습니다.

 

▼ 영휘원의 원침의 모습과 석물들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알아보았습니다

 

▼ 영휘원 망주석의 세호는 마치 다람쥐 같은 모습입니다. 꼬리의 털이 너무 풍성 합니다.

 

▼ 영휘원의 문인석과 석마의 모습을 보면 홍릉이나, 유릉의 석물들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 다음은 숭인원입니다.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소입니다. 원소의 구성은 영휘원과 비슷합니다. 의민황태자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첫째가 이진(숭인원)이며, 둘째는 이구로 홍릉,유릉 권역에 있는 회인원에 있습니다 

 

- 숭인원의 구성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의 원소이다. 원소의 구성은 영휘원과 비슷하다.
홍살문, 향로, 판위, 정자각,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원표석 1기가 있는데 ‘원손 숭인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원침의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호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석물과 봉분의 크기는 다른 원소보다 작게 조성하였다.

- 숭인원의 역사

1922년에 원손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원 동쪽에 원소를 조성하였다.

- 이진 원손(李晉 元孫)이야기

이진 원손(재세 : 1921년 양력 8월 18일 ~ 1922년 양력 5월 11일)은 의민황태자(영친왕)과 황태자비 이씨(방자)의 첫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1922년에 황태자와 함께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1922년 5월 11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급사하였다.

 

배앓이로 죽었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는 독살설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순종황제는 원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을 내렸다.


▼ 이진은 급사하였습니다. 의민황태자(영친왕)가 일본에서 잠시 귀국 하였을때 동행하였는데, 급사 하였으며, 돐도 안된 나이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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