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의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진들이 많아서 3편으로 꾸몄는데, 찍어온 신륵사의 문화재 사진들을 다시 보고, 또한 다시 자세히 여기 저기 자료를 찾아보고 하다보니. 신륵사의 역사를 다 알아 가는 기분이 듭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서 간직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여주 신륵사 문화재(3)에서 소개 할 문화재들입니다
- 보물 제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驪州 神勒寺 三層石塔)
- 보물 제230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 여주 신륵사 문화재(3편)에서는 비지정 문화재 김병기공덕비와, 대장각기비,다층전탑,삼층석탑,강월헌을 소개 하겠습니다
▼ 비신에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라고 새겨진 공덕비에 보호각이 있으며, 고급스러운 대리석을 썼습니다. 공덕비는 보통 절집 옆에 세우는것이 일반적인데, 이비는 사찰 앞마당에 세웠습니다.
▼ 1965년9월에 찍은 김병기 송덕비의 보호각입니다. 옛날에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 어느때인가 개방형으로 바뀌었습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조선 철종대(1849~1863)의 세도가인 김병기(1818~1875)가 신륵사에 시주하여 법당과 구룡루를 보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건립연대는 1860년(철종 11)이다. 규모는 총 높이 약 226.5㎝로, 비신 높이 136.5㎝, 폭 63㎝, 두께 14.5㎝이며, 개석(蓋石) 높이 42㎝, 폭 98㎝, 두께 63.5㎝이고, 방부 높이 48㎝, 폭 91㎝, 두께 63㎝이다.
비신의 뒷면에 음기(陰記)가 13행의 단정한 해서로 새겨져 있으나, 비제(碑題)와 찬서자(撰書者)는 기록하지 않았다. 비신 앞면에 큰 해서로 “판돈령김공병기송덕비(判敦寧金公炳冀頌德碑)”라 적혀 있고, 그 옆에 작은 해서로 “간역 오위장 연안김지택(看役 五衛將 延安金智澤)”이라 되어 있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송덕비 뒤에서 바라보는 비각과 구룡루입니다
▼ 신륵사의 신령스러움이 통했는지 나무가 상상도 못 할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 다층전탑으로 올라가는 길에 돌아본 구룡루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니 절집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으로 보는 같은 위치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 신륵사 동대(東臺)의 다층전탑이 보이는 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비각이 하나 보이는데, 대장각기비각입니다.
▼ 대장각기비각 앞에 이상한 비가 하나 있는데, 알아보니 구룡루 중수비 입니다.
다음은 여주시사에서 인용한 자료글 입니다
조선 영조대(1724~1776)에 신륵사 구룡루를 중수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으로 현재 대장각기비 앞에 세워져 있다. 건립 연대는 1751년(영조 27)이다. 규모는 총 높이 193.5㎝로, 비신(碑身) 높이 140.5㎝, 폭 60.5㎝, 두께 18.5㎝이며, 방부(方趺) 높이 53㎝, 폭 96.5㎝, 두께 62㎝이다.
비제(碑題)는 “여주봉미산신륵사구룡루중수비(驪州鳳尾山神勒寺九龍樓重修碑)”이며, 통훈대부전행사간원헌납(通訓大夫前行司諫院獻納) 권신(權賮)이 글을 짓고 진산후인(晉山後人) 강주팔(姜柱八)이 썼다. 비문은 비신의 전후면과 우측에만 각자(刻字)하였다.
▼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3㎝, 폭은 88㎝로 비신 둘레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 말 새로 유행된 석비형식으로 보제존자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질의 대리석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론 3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다 한다. 서쪽이라면 지금의 명부전 쪽이 되리라 추정된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383년(우왕 9, 홍무 16)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는 나옹의 석종비보다 4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楷書)로 예문관제학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진현관제학 권주(權鑄)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이 비의 형태는 신라 이래 건립되던 일반적인 형식과는 매우 다르다. 즉 귀부와 이수 등의 형태는 볼 수 없고, 그냥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대치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대와 옥개석은 그 조형이 나옹의 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비대에서 뿐 아니라, 특히 옥개에서 공포와 와구 등의 조각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경율론(經律論)
경전을 세 가지로 나눈 경·율,론의 3장(三藏)을 이르는 말이다.
'경'은 석가가 그 제자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설법한 교법(敎法)을 모은 경전이며,
'율'은 석가의 제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모은 율장이고,
'논'은 경과 율이 석가 자신이 설법한 것에 대하여 이를 연구하여 조직적으로 논석(論釋)한 것을 모은 것이다.
이들 3장은 학승(學僧) 등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고 집대성되어 불교가 전파된 나라에서 번역되었으며, 중국에서는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경·율·논으로 분류하여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라 한다.
- 두산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비교해 보면 비석의 상태는 그대로 입니다
▼ 1981년 6월 20일의 대장각기비 건립과정의 사진들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는 비각이 없었으며, 1981년 6월에 건립된 비각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비문이 일부 없어졌는데 청동으로 대장각기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긍금합니다
▼ 신륵사 다층전탑은 신륵사 경내의 동남편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2층 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단 전체를 화강암으로 축조한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용례라 생각된다. 기단의 상면에는 여러 장의 화강암으로 구축한 낮은 1단의 탑신받침이 놓여있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전탑(塼塔)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이며, 보통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이 대부분인데, 벽돌로 쌓은 탑을 보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전탑은 인도와 중국에서 유행한 탑인데, 신라시대에 전탑의 공법이 들어왔다고 하며, 현재 온전하게 남아 있는 전탑은 5기 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벽돌의 특성상 내구성이 화강암 보다는 약할것인데, 아마도 어느 구석이 무너지면 그때 그때 수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전탑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통일신라 시대에만 잠깐 유행하다가 이후에는 거의 전탑은 건립하지 않은것으로 보입니다.
1)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고려, 보물 제 226호)
2)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통일신라, 국보 제16호)
3) 안동 운흥동 오충전탑(통일신라, 보물 제56호)
4)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통일신라, 보물 제57호)
5)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통일신라, 보물 제 189호)
▼ 다층전탑의 일제강점기때의 유리건판 사진입니다.
▼ 신륵사에는 다층전탑을 수리한 기록이 있는데 "신륵사동대탑중수비"라고 합니다. 조선 영조 2년(1726년)에 다층전탑을 크게 수리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아마도 영조원년 부터 다층전탑을 수리하여 영조 2년에 공사를 마친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여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여주 신륵사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여주보가 생겨서 모래톱이 물에 잠겨서 없어졌지만, 여주보가 생기기 전에는 금모래 음모래가 반짝이는 멋진 곳 이었습니다. 붉은색의 원안에 다층전탑과 작게 보이는 삼층삭탑이 보입니다.1968년 5월 사진이며, 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층전탑에서 내려다 보는 삼층석탑과 강월헌입니다. 나옹선사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고 여기 강가의 암반위에서 다비를 하고, 그 은덕을 기리고자 삼층석탑을 건립 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사리는 석종에 모셨습니다
▼ 1985년 여름에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여강의 금모래은모래 유원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4대강사업으로 모래밭을 높게 쌓고 캠핑장으로 만들어서 그 옛날의 아름다운 금모래은모래는 볼 수 없습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강월헌(江月軒)은 나옹화상의 화장터에 건립된 석탑과 인접해 건립된 6각형의 정자이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로 그를 추념하기 위해 건립했던 정자로 생각된다.
이 정자는 본래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대홍수시 파괴되는 바람에 현재의 위치에 콘크리트로 건립했다. 이 정자는 신륵사를 감아 흐르는 여강의 암반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사장과 강물 그리고 멀리 보이는 여주평야 등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삼층석탑은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잔존하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상과 같은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층전탑이나, 삼층석탑이나 단단한 바위 위에 건립하였습니다.
▼ 콘크리트로 재 건립한 강월헌이지만 석탑과 꽤 어울려 주고 있습니다
▼ 완벽하지 않은 삼층석탑이지만, 여강과 참 어울리는 석탑입니다
▼ 1962년 가을에 삼층석탑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으시는 분들입니다. 사진을 찍으시는 분의 위치에는 지금 강월헌이 있는 자리 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그옛날 여강앞을 지나던 뗏목군들의 애환을 지켜봤을 법한 삼층석탑 입니다
▼ 신륵사 강월헌에서 나가는 길에 보이는 수조인데, 옛맛도 배어 나지 않고, 장소도 이상한 곳에 놓여져 있는 수조 인데, 감로수조라고 음각을 하였습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경기지역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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