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의 문화재 이야기 2편 입니다.
사실 신륵사는 고려 시대 이전에 창건되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천릉(遷陵;1469년 예종원년)되면서 부터 조선왕실의 지원에 힘입어서 대찰(大刹)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고려시대의 귀중한 유물까지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주 신륵사의 중요문화재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여주 신륵사 문화재(2)에서 소개 하는 문화재들입니다.
- 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普濟尊者石鐘)
- 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 보물 제231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驪州 神勒寺普濟尊者石鐘앞 石燈)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石造浮屠)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부도(驪州神勒寺圓球型石造浮屠)
▼ 여주신륵사의 가람배치도 이며, 그림이 일부 누락된 문화재도 있으며, 신륵사 문화재(2편)에서 소개 할 문화재는 붉은 화살표로 표시 하였습니다.
▼ 조사당 뒷편의 길다란 계단을 오르면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등의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 조사당 뒷편 계단 오르기 전에 있는 보제존자석종과 보제존자석종앞 석등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부도의 주인이 그림으로 알아봤습니다. 문경의 대승사 묘적암에 있는 나옹선사의 영정이며 자세히 보면 목에 삼도를 그려 넣었습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보제존자석종과 석종비, 석종앞 석등이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비(驪州神勒寺普濟尊者石鍾碑)입니다.
보제존자 석종의 뒤편에 건립된 높이 212㎝ 규모의 석비로, 나옹화상의 일대기와 석종비의 건립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음에 비해,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으로 조성했다. 높직한 판석을 사용해 3단의 지대석을 구축한 후 비좌·비신·이수를 차례로 놓았다.
비좌 역시 3단으로 구성했는데, 하단에는 앞·뒷면에 5엽씩, 양 측면에 2엽 그리고 모서리에 각 1엽 등 모두 16엽의 단판복련(單瓣覆蓮)을 조각했다. 중대석에는 앞·뒤 면에 각 2구씩 그리고 측면에 각 1구씩 모두 6구의 안상을 새겼는데, 내면에는 동물문양을 조식하고 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동일한 양식의 연화문을 조식했는데, 하대석이 단판인 점에 비해 복엽복판의 앙련인 점만 다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조성한 2면비로, 양 측면에는 화강암으로 기둥을 세워 비신을 감입했다. 기둥의 전면에는 2조의 세로선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사상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더욱이 뒷면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문도(門徒)와 석종과 비의 건립에 관여한 도속(道俗)의 명단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명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썼는데,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체로 썼다.
옥개석은 우진각 지붕형으로 하면에는 공포와 서까래가 상단의 낙수면에는 기와골이 정연히 모각되어 있다. 용마루의 양 끝에는 각각 1구씩의 용두가 표현되었다.
이 비석은 전통적으로 귀부와 이수를 구비한 것으로부터 장방형의 비좌와 지붕형의 옥개석을 구비한 양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1379년(고려 우왕 5)에 건립되었다._여주시사(麗州市史)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입니다. 부도 또는 승탑이라고 하지 않고 석종이라고 하는것이 좀 생소합니다.
보제존자석종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스님의 사리탑이다. 양식상에 있어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형식이 아니라 석종형부도(石鍾形浮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석을 깔아 마련한 묘역에 방형의 넓은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상면에도 박석을 깔고 중앙에 2매의 판석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석종형의 탑신을 놓았다. 기단의 전면과 양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면석에는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석종의 신부(身部)는 위로 갈수록 원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게 처리하였는데, 상면에는 보주(寶株)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둔중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건립되는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된다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에 각각 건립되어 있다. 양 부도의 건립에 대해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에는
“8월 15일 부도를 사(寺)의 북안(北岸)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모시니 그의 입적하신 곳을 표시하려는 뜻이요 석종(石鍾)으로 덮었으니 감히 와전(訛傳)되는 일이 없기 위해서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 각각 두 곳에 건립되었고, 이 중 신륵사의 것은 석종으로 덮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암사의 부도는 선사의 입적 후 3개월 만인 1376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륵사의 부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인근에 건립되어 있는 「보제존자사리석종기(普濟尊者舍利石鐘記)」가 1379년(고려 우왕 5)에 각신(覺信), 각주(覺珠) 등의 주관으로 건립된 점으로 보아 이 부도 역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65년 9월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산자락에 나무들이 별로 없어서, 여강이 잘 보입니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서 여강이 안보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보제존자석종앞에는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석등이 나옹스님의 사리탑 앞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기단부와 옥개석의 재질은 화강암인데, 화사석(火舍石)은 달라 보이는데, 납석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거무스럽게 보이는 납석이며, 화강암 보다는 무르기 때문에 조각이 쉬웠을 것 입니다.
▼ 이 중 기단부가 다른 석등에 비해 낮게 조성되어 마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를 보는 듯하다. 지대석은 평면 8각의 형태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1석으로 조성된 기단부는 하대·중대·상대의 3부분으로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되어 부도 및 부상의 대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석에는 복엽 16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잘록한 간주석에는 각 모서리에 연주문(蓮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내면에 아(亞)자형의 안상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는 복엽 16판의 앙련을 조식했는데, 상면에는 아무 받침 없이 편평하게 다듬어 화사석을 놓았다.
팔각형의 평면을 지닌 일반형 석등의 화사석은 다른 부재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납석제를 사용해 높게 조성되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화창은 각 면에 1개씩 모두 8개를 개설했는데, 사라센 계통의 완만한 곡선의 화두창(花頭窓)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율동감 넘치는 반룡문(蟠龍紋)을 섬세하게 양각했고, 상면에는 평창과 창방을 조각해 목조건축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방과 화창 상면의 공간에는 하강하는 형태의 비천을 고부조(高浮彫)로 양각했다. 화사석에 다른 석등과는 달리 목조건축의 표현과 더불어 반용과 비천을 배치하고 있음은 납석을 재료로 선택한 까닭에 섬세한 조각이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1962년 11월 사진이며, 어느 문화재 관계자 분과 여주군청 직원분이 석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은 여주 신륵사와 양주 회암사지, 원주 영전사에 각각 건립 되었습니다. 나옹선사의 사리를 세곳으로 나누어서 보관하였다는 것은 처음 보는 것 입니다. 아마도 나옹선사가 회암사의 주지로 있었던 인연과 그의 제자들이 사리를 나누어 안치했을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 자료사진은 회암사지에 있는 부도와 석등 입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정원에 있는 보제존자 사리탑입니다. 특이하게 쌍탑으로 되어 있는 사리탑입니다.
▼ 신륵사 조사당 옆에는 두기의 승탑(부도)이 나란히 건립되어 있습니다. 구조가 비슷 하지만 중앙부 탑신의 모습만 다릅니다
▼ 두기의 승탑중에서 뒷쪽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팔각원당형석조승탑이며, 앞쪽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원구형석조승탑입니다. 원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두기의 승탑을 보고 있으면 단연 주목되는 것은 팔각원당형 승탑입니다.
▼ 탑신이 원구형인 석조승탑입니다. 보통은 탑신에 누구의 승탑인지 음각을 하는데,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 조선후기의 승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옥개석과 보륜,보주가 일석으로 보입니다
▼ 탑신이 특이하게 보이는 팔각원당형승탑이며, 누구의 승탑인지 각인된 문자가 없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리건판 사진자료에는 (전)보조국사승탑이라고 되어 있는데, 보조국사는 지눌입니다만, 정확하지가 않아서 전하는 설에 의하면...보조국사승탑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일제강점기때의 사진입니다)
▼ 탑신부는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梵字)를 양각한 것이 특징이며, 중대석은 마치 맷돌처럼 얇은 원통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무런 문양이나 안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옥개석을 보면 귀꽃이 큼지막하게 조각되어 있고, 귀꽃 마다 보살님이 들어 있습니다. 승탑의 구조가 약간 기울어져 보이는데, 옥개석이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 탑신의 각면에 문비가 새겨져 있고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보이는데, 梵字를 양각 한 것이라고 합니다.
▼ 승탑군 앞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모습입니다.
▼ 승탑군에서 왼쪽으로 내려 가면 명부전이 보이는데,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합니다.
▼ 나무로 조성한 10왕과 더불어 판관(判官), 명사(銘士)등 모두 29구의 조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 명부전 옆에는 봉송각(奉送閣)이 보이는데, 처음 보는 건물입니다. 보통은 49재 이후에 망자의 소지품을 간략하게 소각하는데, 신륵사는 소각장옆에 작은 불당을 배치 했습니다.
▼ 범종각 내부를 보니 자주 사용 하지는 않는듯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작은 북은 많이 훼손되어 보이던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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