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창리, 하리삼층석탑은 여주 여강(남한강)변 영월공원에 있습니다. 두기의 석탑은 1958년 11월에 이곳 영월루 근처에 이전되었습니다

 

□ 소재지 : 여주시 상동 132
□ 시 대 : 고려
□ 지정사항 : 보물 제91호[창리삼층석탑]

□ 지정사항 : 보물 제92호[하리삼층석탑]

□ 주차장 : 양호합니다

※ 여기에 인용된 자료는 문화재청 홈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여주시 영월공원에는 1958년에 이전된 두기의 삼층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두기의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모양새는 완전히 틀린 모양를 하고 있습니다. 왼쪽이 하리삼층석탑, 오른쪽이 창리삼층석탑입니다.

 

▼ 남한강(여강)주변에 과수원과 밭에 각각 방치되었던 고려시대 석불은 1958년 지금의 영월공원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창리와 하리는 지금의 창동, 하동으로 바뀌었고, 현재의 지도로 위치를 가늠하여 위를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여강 건너서는 신륵사가 있는데, 여강 근처에서 삼층석탑을 모시던 이름도 모르는 절터는 삼층석탑만 남긴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면 영월루로 올라가는 계단옆에 삼층석탑 두기가 보입니다.

 

▼ 앞쪽(좌측)이 창리삼층석탑이며, 우측이 하리삼층석탑인데, 모양만 삼층석탑이고, 하부 구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하리삼층석탑의 생김새는 지금까지 봤던 일반적인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의 보습을 하고 있습니다.

 

▼ 앞쪽의 창리삼층석탑을 보면 1단 탑신석은 옥개석과 분리되어 있는데, 2단,3단의 탑신석은 옥개석과 일체형으로 원래의 전체모양이었던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하대갑석은 처음 보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복련(엎드린 연꽃)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석공이 욕심이 과해서 모양새를 너무 추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창리삼층석탑의 지대석을 보면 전혀 다듬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혹시 탑을 이전 하면서 추가로 끼워 넣은 것인지 일제 감점기때 사진을 찾아봤으나, 원래부터 있었던 지대석이었습니다.


▼ 창리삼층석탑을 보면 마치 아가씨가 하이힐을 신은듯 날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처음 보는 기단석의 모습과 일체형과 분리형의 지붕돌과 탑신의 모양새를 보면 이 탑을 만든 석공은 뭔가 번득이는 생각이 있었던 분이었나 봅니다. 창리 석탑은 고려시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하대갑석 바닦면에는 안상이 두개씩 새겨져 있습니다. 초층 탑신석 상면에서 16.7cm×3cm의 얕은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높이 4.4cm의 동제여래입상(銅製如來立像) 1구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 다음 창리삼층석탑의 일제감점기때 자료사진이며, 1916년~1918년의 사진들입니다. 첫째 사진의 석탑앞의 불두가 없는 석불은 근처 어디선가 옯겨져 왔는 듯 한데, 지금은 없어진듯 합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에도 변함이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에는 1000년이 넘은 석탑도 많습니다.


▼ 하리 삼층석탑입니다. 일반적임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리삼층석탑을 이전 할 때 같이 이곳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 1층 탑신에서 특이한 사리공이 확인된 바 있으나 내용물이 남아 있지 않아 이 둥근 구멍이 무슨 용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탑은 신라 이래의 전형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에 조성 하였을 것이나 외형의 온아(溫雅)한 비율이나 각 부분 구성의 규율성(規律性)으로 보아 고려 중기로 추정딘다고 합니다. 상륜부는 완전히 소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1층 탑신상부에  구멍이 보이는데, 도굴의 흔적인지 모르겠습니다.

 

▼ 상륜부가 없으니, 보기에 약간 허전한 느낌입니다

 

▼ 다음은 일제강점기때의 학술자료사진이며, 1916~1918년 사이의 사진들 입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