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의 대로사는 조선시대의 꼰대로 불리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향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며, 조선 고종10년(1873년)때 대원군에 의한 서원쳘폐령때 강한사(江漢祠)로 개명하였습니다만, 지금은 다시 대로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조선 전국에는 송시열의 사당이 모두 44개에 이르렇다는 자료가 있는데, 조선시대때의 유학자들에게는 대단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 지정사항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

 

1785년(정조 9) 영·녕릉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한 정조가, 숙종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향하기 위해, 수행한 김양행(金亮行, ?~1779)에게 대로사(大老祠, 강한사)를 짓게 하고 곧 바로 사액을 내렸다.

 

대로사라는 명칭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으로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며 『맹자』에 그 용례가 보인다. 또 실록에는 정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대로(大老)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題名)을 『대로일고(大老逸稿)』라 하였으니, 대체로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는 기사가 있어 대로사라는 명칭이 붙게 된 연유를 알 수 있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녕릉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현재 대로사의 홍살문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옆으로 돌아서 가면 도로옆에 출입구가 있습니다. 봄(춘향제)에 한번, 가을(추향제)에 한번씩 제향때 문이 열린다고 합니다.

 

▼ 자료사진(1981년 5월)으로 보는 30년 전 그때의 홍살문과 앞마당의 모습입니다. 1981년 5월에 비각과, 홍살문등을 수리하였는데, 수리하기 전의 사진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현재의 대로사의 배치도 입니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대로사와 주변 마을의 모습입니다. _이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로사의 아주 오래전 1972년의 사진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로사는 여주 시내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대로사는 크게 추양재(秋陽齋)와 대로사비각, 대로서원 강당, 그리고 대로사 본채의 건물로 구성되어있다. 추양재는 관리실로 사용하기 위해 최근에 신축한 건물이며, 대로사비각에는 1787년(정조 11) 송시열이 태어난 뒤 세 번째 맞는 회갑년을 기념하여 평소 송시열을 존숭하던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쓴 비석을 안치하였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御筆)”이라 표기되어 있다.

 

대로서원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처마 밑에는 정조대 명필중의 한사람인 도천(道川) 황운조(黃運祚, 1730~ ?) 가 휘호한 “대로서원(大老書院)” 현판이 걸려있다. 또 내부에는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 1732~ ?)의 전서로 된 “첨백당(瞻柏堂)”과 황운조가 행서로 활달하게 쓴 “강한루(江漢樓)” 편액이 있다.

 

이외에도 덕수(德水)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지은 「강당상량문(講堂上樑文)」과 1785년(정조 9)에 원임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大老祠上樑文)」도 게시되어있어 대로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어 강당 우측의 장린문(長隣門)을 들어서면 대로사 본채가 나타난다. 녕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웠으며, 내부에는 송시열의 입상(立像)으로 된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있다. 사당의 정면에는 1785년(정조 9) 사액받을 때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김종수(金鍾秀, 1728~1799)가 써서 내려준 “대로사(大老祠)” 현판이 있다.

 

이후 경기지역 노론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며 약 백여 년 간 유지되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크게 훼철할 때 사라질 운명에 처했으나 다행히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명칭만은 강한사(江漢祠)로 개명하였는데, 이때 원임대제학(原任大提學)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왕명을 받들어 쓴 “강한사” 현판이 현재도 사당의 뒤쪽처마에 달려있다. ‘강한(江漢)’은 중국 양자강과 한수(漢水)의 인근지역을 일컫는 것으로, 강한사가 위치한 여주가 이들 지방처럼 풍광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송시열은 효종대왕이 북벌을 꾀할 당시 북벌을 논의하던 가장 신임 받는 신하였다. 함께 북벌을 논의하던 이완대장묘가 효종대왕을 뵈옵듯 효종대왕릉을 향해 위치해 있듯이, 이곳 대로사 역시 서쪽을 향하여 효종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_여주시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로사 기적비등과, 맨 오른쪽의 대로사추양재기실비는 1990년에 세운비이며, 추양제는 1990년에 건립한것으로 보입니다

 

▼ 대로사의 재실과 사무실로 쓰이는 추양재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대로사 사진이 담긴 엽서입니다. 대체적으로 대로사 전체의 모습은 양호해 보입니다. 주변에는 전부 논이 보입니다._이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원래 대로사의 사진을 보면 재실이 보이는데, 오랜세월에 없어졌는지 1990년대에 새로운 한옥을 짓고 추양재라는 편액을 달았습니다.

 

▼ 추양재는 대로사의 재실로, 멋진 붓글씨로 편액을 달았습니다. 글씨는 일충 김충현선생이 병오년에 썼는데, 병오년은 1996년입니다. 일충 김충현(1921~2006)은 서예가로 유명하신 분입니다.

 

▼ 현재의 홍살문과 대로사의 보호각의 모습입니다.

 

▼ 1981년 5월에 홍살문, 대로비각등의 수리작업전과 수리중일때의 모습입니다.

 

▼ 시대별로 찍어둔 사진으로 보는 대로사 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대로사비의 담장과 높게 세워진 대로사비 보호각의 모습을 보면 송시열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 우암 송시열이 사사될때가 1689년(숙종15년)이고, 정조가 대로사비문을 쓴것이 1787년(정조11년)이므로 98년만에 복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로사비(大老祠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하동 199-1번지이다.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대로사(大老獅, 현 강한사)의 내력을 적은 비로, ‘대로’선생에 대한 존칭이다. 우암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 9년(1658) 이조판서에 승진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의정을 거쳐 현종 13년(1672) 좌의정이 되었다. 현종 15년(1674)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일시 유배되었다가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숙종 9년(1683)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노론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 봉림대군 : 효종

※ 자의대비 : 장렬왕후로 인조의 계비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괴산 화양동에서 은거하였으며, 숙종 15년(1689) 왕세자(경종) 책봉 문제로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일생을 주자학(朱子學)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예론에 밝았으며 뛰어난 학식을 지녔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은 여주에 머무를 때마다 효종의 능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후배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었다 한다. 정조가 영릉을 행차하다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김양행에게 대로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는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정조가 노론이 받드는 송시열을 높여줌으로써 노론의 불만을 달래려 한 정치적 의도를 말해준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한사(江漢祠)로 이름만 바뀐 채 화를 면하였다.

※ 대로사비는 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었다. 앞면에는 ‘대로사비’라는 전서(篆書) 제목이 있고 나머지 면에 정조(正祖)가 짓고 쓴 비문이 있다. 정조 11년(1787)에 세운 비로, 정조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_문화재청에서 인용.

 

▼ 외삼문을 들어서면 제향공간인 대로사 입니다.

 

▼ 외삼문에서 대로사의 내삼문앞까지 신도(神道)가 이어져 있습니다.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나즈막 하고 기품있는 6카의 정자가 있습니다. 정면에는 대로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건물 하나에 여러 이름들이 걸려 있는데, 대로서원의 글씨는 정조때의 명필 도천(道川) 황운조(黃運祚)이며, 작은 현팡의 첨백당(瞻柏堂)의 글씨는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의 글씨입니다

 

▼ 원임대제학(原任大提學)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1871년(고종 8) 왕명을 받들어 쓴 “강한사” 현판입니다.

 

▼ 내부에는 정조때 명필 황운조(1730년(영조 6)∼1800년(정조 24))가 행서로 활달하게 쓴 “강한루(江漢樓)” 편액이 있다.

 

▼ 대로사의 내삼문인 장린문입니다

 

▼ 장린문앞에서 바라보는 외삼문 방향입니다. 좌측은 재실인 추양제, 오른쪽은 강당인 대로서원입니다.

 

▼ 대로사 앞에서 보면 바라보는 방향이 효종영릉 방향입니다

 

▼ 장린문은 평소에는 잠겨 있습니다. 

 

▼ 문창살 사이로 바라본 대로사의 모습입니다

 

▼ 대로사라는 사당의 이름은 정조가 짓고, 정조9년 9월 19일 조정의 제학 김종수가 썼습니다.

 

▼ 가을에 올리는 제향을 추향제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1995년 9월 추향제때의 사진 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로사의 뒷편에는 강한사의 편액이 걸려 있는 옛날 사진인데,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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