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 고달사지는 여주시 외곽에 있으며, 양평군과도 가까이 있습니다. 고달사지는 그냥 절터이기는 하지만, 남아 있는 문화재들의 가치가 대단한 보물작품이 있는 곳 이어서 한번 다녀 왔습니다. 또한 고달사지 근처에도 여러 문화재들이 있어서 시간 한번 내서 다녀오면 좋은 곳 입니다. 


▼ 여주고달사지는 총11차에 이르는 20여년간의 발굴조사를 끝내고, 조사지역은 보존상태로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고달사지는 그냥 봐도 대단히 큰 절터였습니다.

 

▼ 고달사지와 원종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혁표입니다

 

▼ 안내문에 표시된 번호로 표시된 곳으로 돌아보면 되는데, 5번의 쌍사자석등은 현재 고달사지에는 없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옯겨져 있습니다.

 

▼ 여주고달사지를 발굴하기전의 시대별(1970년,1972년,1982년,1983년) 사진입니다

 

▼ 참고사진으로 보는 1982년의 발굴조사전에 헐어낸 주거지역의 잔해들을 치우는 모습으로 보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참고사진으로 보는 1983년의 발굴조사와 발굴작업의 인부 모습입니다._여주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고달사지는 현재 11차까지 발굴조사를 실시 하였는바, 그 발굴이력은 1998년 ~ 2019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발굴조사면적이 그만큼 넓었다는 것 입니다.

 

▼ 발굴조사중(2006년 6차)인 현장의 하늘사진입니다.

 

▼ 발굴조사를 마친 2000년도의 하늘사진입니다

 

▼ 발굴조사 현장을 묵묵히 지켜봤을 느티나무도 이제는 지쳐서 고목으로 생을 다 하였습니다

 

▼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의 모든 유물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가치와 소중함은 일치감치 문화재전문가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 안내 표지판을 따라서 들어가 보는데, 첫번째는 깨진 석조 입니다

 

▼ 고달사지에는 석조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깨져 있습니다.  발굴조사 전부터 깨져 있었으며, 깨진 조작들도 찾지 못한것 같습니다. 주민들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깨졌을것으로 보입니다.

 

▼ 다른 하나는 완벽한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이 석조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안에 있었던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보통은 석조가 건물 밖에 있는데, 건물안에 있는것은 특이한 경우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에서 보면 석조가 건물내부에 들어서 있는데, 석조 양쪽으로 구들방이 있던 것으로 봐서는 부엌에서 쓰던 석조는 아닌듯 합니다만, 방이 있는 부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습니다.

 

▼ 금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대단한 크기의 석조대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상태는 매우 좋고, 지대석만 수리하면 지금이라도 부처님을 모셔도 훌륭 할 만큼 매우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네면의 모양을 똑같이 암각하였는데, 대담하면서도 세밀한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은 일제강점기때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고, 촬영된 모습입니다. 민가들의 모습을 보면 아주 오래전 부터 고달사지에는 민가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불상은 어디로 갔을까요?...

 

▼ 1970년대로 보이는 사진이며, 그나마 보호펜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금당터의 기둥받침돌이 보이는 건물터의 모습입니다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는 원종대사혜진탑비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비신은 깨졌으며, 현재 비신은 새로 만들어서 세운 모습입니다.

 

▼ 원종대사탑이는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가 여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가 최근에 비문을 다시 새긴 비신을 설치하였습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원종대사탑비의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 건립에 참여한 제작 역사

- 원종대사의 탄생과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

- 불교를 연구하는 과정과 스승에 대한 내용

-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내용

- 귀국하여 궁중에 들어간 내용

- 설법한 중요 내용에 대한 정리

- 열반 후 추모 과정

- 제자들에 대한 이름

 

▼ 거북이 머리라기 보다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몹시 험상굿게 만들어졌습니다. 거북의 발톱이 5개를 정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 귀부의 뒷모습인데, 좌,우로 한개씩 있는 돌은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습니다. 보호각의 지줏돌처럼 보이지만, 4개가 있어야 맞는데, 두개뿐이어서 의아합니다.

 

▼ 여기서 일제강점기때의 원종대사비의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진의 촬영년도를 보면 1916년에 찍은 사진들인데, 첫번째 사진은 비신이 멀쩡 합니다. 일본학자들이 탁본을 하려고 비신을 분리해서 누인듯 합니다

 

▼ 비신이 멀쩡 할때 탁본한 사진입니다

 

▼ 이수가 분리 되기는 했지만, 비신은 멀쩡하게 보입니다.

 

▼ 비신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비신의 탁본이 끝난후에 비신을 세우려다가 전도되어 파손된듯 합니다

 

▼ 원종대사탑비의 조각난 상태의 모습이며, 현재는 여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재 고달사지의 탑비는 모사한 탑비입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나, 기나 여려곳의 자료를 찾아보면, 대부분이 원종대사탑비가 아직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문화재를 총괄하는 문화재청의 자료가 몇년씩 틀린상태로 있다니, 너무 일이 많으셔서 그렇다고 이해합니다. 일년에 한번씩 지방자치단체의 자료업데이트 캠페인좀 하면 좋겠습니다. 문화재 위치 주소도 물론...

 

▼ 1916년 이후의 사진들입니다

 

▼ 이수는 비신이 전도될 때 깨진것으로 보입니다. 

 

▼ 이수에 새겨진 글씨는 ... 慧目山高達院國師元宗大師之碑(혜목산고달원고국사원종대사지비)

 

▼ 원종대사비 윗쪽에는 또다른 규모가 작은 귀부가 보이고, 비신은 없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찍은 사진과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입니다.

 

▼ 고달사지의 북쪽 끝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없는 보물이 하나 있는데, 쌍사자석등이 안 보입니다만, 석등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서 자료사진으로 봐야 합니다. 

 

▼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하면서 찍은 쌍사자석등의 일부 모습입니다. 어느 민가옆에 방치되어 있고, 일부 석재들이 유실되어 있어서 언뜻보기에는 무슨 모양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훼손된 모습이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발굴된 부분석재들 맞추어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보물급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대석만 새로 끼어넣었습니다. 보물 282호 입니다

 

▼ 보기 어려운 매우 뛰어난 작품이 넘치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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