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중초사지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중초사지는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부근에 있는 절터로 옛 유유산업(현 유유제약) 부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과 약간의 석재들이 남아 있고, 발굴조사를 통해서 중문과 석탑, 금당(金堂)·강당등의 건축물이 배치됬던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당간지주가 보통은 사찰의 입구나 대웅전앞에 세웠던 것으로 봐서 현재 당간지주의 위치가 사찰의 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삼층석탑은 원래의 자리는 동북쪽으로 약 60m 떨어진 지점의 사찰의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무너져 있었는데, 1960년대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중초사(지)는 통일신라시대때 창건(827년 추정)되었다가 고려개국 이전 900년대에 왕건이 금주(衿州)와 과주(果州)를 징벌하려고 삼성산으로 가던 중 산꼭대기 구름이 오색으로 찬란한 모습을 보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했다.

 

이때 구름 밑에서 자신을 능정(能正)이라 칭하는 노승이 내려와 지금의 자리에 사찰을 세우고 안양사(安養寺)로 재 창건 되었으며, 현재 안양의 지명을 제공하였고,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 금주(衿州) : 지금의 영등포·금천·광명·박달동·석수동

※ 과주(果州) : 지금의 서초·과천·안양 안양동 및 동안구 전역·군포

 

지금의 석수동에 있는 안양사는 안양사지와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보입니다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구)안양사의 암자가 지금의 안양사 이름을 물려 받은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의 안양사에도 고려시대의 문화재가 있습니다.

 

- 주소 : 경기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103번길 4 (석수동)

- 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

- 삼층석탑(中初寺址三層石塔)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

- 주차장 : 주변의 유료주차장 이용


▼ 예전의 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이며, 지금은 안양박물관의  정문에 있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입니다. 설명자료에 의하면, 당간지주는 현재 자리에 있었으나, 삼층석탑은 옯겨온 것 입니다.

 

▼ 안양시 중초사지(안양사지)를 하늘에서 보는 사진인데, 중초사지(안양사지)의 구역이 꽤 넓었습니다

 

▼ 당간지주 하나가 많이 기울어져 있는 자료사진 모습이며, 지금은 보수를 해서 곧게 세워져 있습니다


▼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당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실제는 두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보통 당간지주를 보면 그 좋은 면석에 왜 명문(銘文)하나 없을까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 당지지주가 세워져 있는 대(臺)가 유난히 높아 보이는데, 삼층석탑과 비교해 보면 50cm정도 차이가 있는데, 1960년대에 유유산업 공장을 신축할때, 당간지주 주위의 땅이 깍였을 가능성이 있을 수 도 있을것입니다. 삼층석탑은 지금의 박물관 주위에서 무너져 있던것을 1960년대에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고 탑신과 옥개석을 다시 맞춘것인데, 2층과 3층의 탑신이 없이 조립되었습니다.

 

▼ 삼층석탑은 원래 당간지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60m 떨어진 지점의 사역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무너져 있었는데, 1960년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기단은 단층으로 지대석은 판석형 석재를 여러 매 결구하여 마련하였다. 그 위에 각형 2단의 별석(別石) 받침을 높게 두었는데, 고려 시대 석탑에서 채용된 수법을 보인다.

 

면석(面石)은 4매의 석재를 결구하였고, 우주(隅柱)는 좁고 낮게 모각(模刻)하였다. 갑석(甲石)은 2매의 석재를 결구하였는데, 하부에 갑석 높이보다 낮은 부연을 마련하고, 상면에도 낮게 탑신받침을 두었다.

 

단층기단이면서 면석이나 갑석 부연 등에서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고려 시대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성행한 석탑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탑신석은 1층만 남아있는데, 기단부나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의 너비에 비하여 좁게 치석했고, 양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2층까지 남아있는데 전체적으로 비례가 우수하다.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은 규모가 축소되면서 3단으로 치석하였다. 처마부는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전각부가 파손됐지만 반전(反轉)을 확인할 수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수평으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탑신석 규모가 옥개석과 기단에 비해 소형이며, 옥개석 낙수면의 형식화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사진에서 보면 민가가 보이고 탑은 무너져 있는데, 대개 수많은 탑의 대부분은 무너진채로 장기간 방치되어 후대에 다시 세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사리공의 보물을 훔쳐가려고 누군가 탑을 무너트렸는지, 조선시대때 불교배척의 영향으로 일부러 부너트렸을 가능성도 많았을 것 입니다.

 

▼ 2,3층의 탑신석은 분실되었는데, 그 큰돌이 탑 주위에 없었다는 것은 민가에서 가져가서 집을 지을때 사용했을 수 도 있을것입니다. 가끔 보면 건물의 옛날 주춧돌이 탑신석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 안내그림을 자세히 보면 전탑지가 보이는데 원래 7층전탑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현재는 그 형체를 알 수 가 없어서 다른 곳의 전탑을 참고해야 합니다

 

▼ 안양사지(중초사지)를 발굴조사를 하고, 안양사의 옛 모습을 재현한 모형입니다. 중문과 금당 사이에 7층 전탑이 보입니다._경기관광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안양사지(중초사지)의 7층전탑을 참고하기 위한 자료사진이며, 안동의 법흥사지의 7층전탑입니다. 앙양사지의 7층전탑도 이와 같은 모양이었을 것 이라고 생각 됩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안양사지를 발굴하면서 모아 놓은 석재들입니다. 

 

▼ 생긴 모양이 마치 집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긴 나무로 걸쳐놓는 돌기둥처럼 보입니다만, 아마도 승방앞에 긴 막대를 걸쳐놓는 돌기둥이 아닌가 싶습니다.

 

▼ 안양사지를 발굴하고 결과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양사지는 상당히 넓은데, 기존 건물밑의 유구들은 이미 훼손 되었을 것이고, 건물주변의 발굴조사 만으로도 상당한 자료가 만들어졌지만, 안양사를 다시 복원하는 일만은 그리 싶지가 않을듯 합니다.

 

▼ 안내판 앞 건물옆이 7층전탑이 있었던 곳입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