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거창 신씨(愼氏)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원비입니다.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며. 1499년 13세에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과 혼인하여 ‘부부인’에 봉해졌습니다.
1506년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되자 왕후에 올랐으나, 고모(신수근의 여동생)가 연산군의 비(폐비 신씨)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로 연산군 축출을 위한 반정 모의에 반대한 일로 성희안(成希顔) 등에게 살해되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왕비에서 7일 만에 폐위되었습니다.
이후 사가에서 홀로 살다가 1557년 12월 7일 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친가의 선산에 안장되었습니다. 1739년(영조15)에 3월 28일 복위되면서 시호를 ‘단경(端敬)’, 휘호를 ‘공소 순열(恭昭順烈)’,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동안 온릉은 개방되지 않은 릉이었지만, 2019년 11월 14일부터 개방된 것을 알고 2022년 5월 18일에 다녀왔습니다
※ 자료사진은 문화재청(왕릉관리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양주온릉은 2019년 11월 14일부터 시범 무료공개로 개방하고 있습니다만, 언제까지 무료개방인지는 공고가 없습니다
▼ 재실을 먼저 들려 봅니다.
▼ 기본적인 왕릉의 모습입니다,
▼ 단경왕후는 참으로 복도없는 왕비였습니다만, 조선왕조 때 왕비들이 정치적으로 희생이 돼서 불행한 삶을 사는 왕비들은 많았습니다만, 단경왕후는 그래도 71세까지 살았습니다.
영조 15년(1739)에 시호를 단경, 묘호를 온릉이라고 하여 사후 182년 만에 왕비로 복위하였습니다
▼ 온릉(溫陵)의 배치도 자료사진 입니다.
▼ 조선왕릉 사이트에서 온릉의 자료사진입니다. 단경왕후는 폐비후에 사가에서 중종의 소식을 많이 기다렸다고 하는데, 중종은 실제 단경왕후를 그리워하거나, 찾은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잊혀진 여인이었습니다.
▼ 제11대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후 계비 장경왕후 신씨를 들였지만 인종(12대)를 낳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비로 복위 될 기회가 있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두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들였는데, 그가 바로 문정왕후입니다.
문정왕후는 권력의 욕심히 심해서 동생 윤원형을 앞세워 피바람을 일으켰으며, 결국을 인종을 독살(?)하고 아들 경원군을 왕좌에 앉혔습니다.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은 유명한 태릉입니다.
▼ 온릉(溫陵)은 일반 묘에 석물들을 세우고, 추봉 왕비의 예는 다하였으나, 석물들의 수는 반으로 줄여서 세워졌습니다.
온릉溫陵(중종비 단경왕후)의 역사적 이야기입니다
- 능의 구성
온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이다. 1739년(영조 15)에 단경왕후가 복위되면서 조선 후기의 추존 왕비릉 제도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1쌍과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 능의 역사
중종의 폐비 신씨가 1557년(명종 12)에 세상을 떠나자 친정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정릉(貞陵)과 사릉(思陵)의 예에 따라 새롭게 조성하였다.
- 단경왕후(端敬王后) 이야기
단경왕후 신씨(재세 : 1487년 음력 1월 14일 ~ 1557년 음력 12월 7일)는 본관이 거창인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1487년(성종 18)에 태어났다. 1499년(연산 5)에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이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역적(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을 반대했었음)이라는 이유로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폐비 신씨의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1557년(명종 12)에 사저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82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시호를 단경왕후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 개발이 난무하는 한국에서 왕릉은 개발 억제력을 지닌 대단한 영적인 힘을 가진 신이 잠든 곳입니다.
▼ 수복방은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수복방도 복원한 왕릉도 더러 있습니다
▼ [자료;문화재청] 온릉(溫陵)의 지붕에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안 보입니다. 온릉의 정자각만이 유일하게 추녀마루에 잡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왼쪽의 운계는 왕이라고 해도 밝고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며, 오른쪽 어계로 올라갑니다
▼ [자료:문화재청] 온릉(溫陵)의 운계는 마모가 무척 심해 보이는데, 소맷돌의 문양을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 정자각에서 홍살문을 바라봅니다.
▼ [자료:왕릉관리소] 정자각 내부에서 홍살문을 바라봅니다
▼ 정자각 내부에서 릉을 바라봅니다.
▼ [자료:문화재청] 정자각과 릉 사이에 신이 드나드는 다리가 있습니다
▼ 비석에는 총탄 자국이 가득합니다. 6.25 전쟁 중에 총탄을 맞은 비석은 많습니다
▼ [자료:문화재청]
묘표 전면 :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
묘표 후면
공소 순열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대왕의 원비로, 성화 23년인 정미년(성종18, 1487) 정월 14일에 탄생하였다. 정덕 원년인 병인년(중종1, 1506)에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얼마 못가 폐위되어 친정으로 물러났다. 가정 36년인 정사년(명종12, 1557) 12월 7일에 승하하여 양주 서산 장흥면 수회동 해좌(북서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71세이다. 영조년간 기미년(영조15, 1739)에 복위하고 시호를 올렸다.
숭정 기원후 180년(순조7, 1807) 정묘년 4월 ?일에 세우다.
▼ 제향이 끝난 후 축문등을 태우거나 묻는 곳(예감)입니다. 조선왕릉에서 1대(건원릉), 2대(후릉), 3대(헌릉)까지만 소전대를 사용해서 축문을 태웠지만, 4대(영릉) 이후에는 예감을 사용했습니다. 왼쪽이 예감, 오른쪽이 소전대(헌릉)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자료사진으로 온릉을 보겠습니다(릉으로 올라가서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 온릉(溫陵)의 망주석의 세호를 보면 오른쪽 세호와 왼쪽의 세호의 가는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왕릉마다 차이는 있는데, 보통은 오른쪽 세호가 하늘 방향이고, 왼쪽의 세호가 땅 방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 온릉(溫陵)의 문인석과, 무석인의 모습과 그 옆의 석마들의 모습들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서쪽 석마는 주둥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 온릉(溫陵)의 봉분 주위에는 2마리의 석양과 석호가 있는데, 석호의 얼굴 모습이 그다지 무서워 보이지 않습니다.
▼ 온릉(溫陵) 봉분 앞에는 있는 혼유석을 받치고 있고 고석(족석)에는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귀면 문양이 마치 절의 사천왕 얼굴과 비숫합니다.
▼ 온릉(溫陵)의 곡장의 모습은 신들의 정원인 만큼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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