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에서도 한참 멀리 있는 영월에는 짧지만 한을 안고 숨진 단종의 능침인 장릉이 있습니다. 영월장릉(莊陵)은 조선왕릉중에서 한양에서 가장 멀리 있는데, 웬만하면 쉽게 가 볼 수가 없는 곳이지만, 시간을 내서 다녀 왔습니다. 영월장릉의 관리주체는 영월군청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영월장릉의 위치지도 입니다.
조선왕릉에는 장릉이 3기가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왕릉중에서 장릉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릉을 알아 보겠습니다.
- 6대 단종 영월장릉(莊陵)
- 16대 인조의 사친 추존왕 원종.인헌왕후 김포장릉(章陵)
- 16대 인조.원비 인열왕후 파주장릉(長陵)
▼ 단종의 가계도를 보는 것 보다는 문종의 가계도를 보는것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 영월장릉의 상설그림인데, 홍살문이나, 정자각등의 배치가 다른 릉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유는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세상을 떠나 동강에 바려졌을때,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시신을 거두어 엄홍도 가문의 선산에 급히 매장을 하였고, 한참후에 단종의 매장지를 찾아서 릉을 조성할때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서 건물들이 배치되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 장릉의 상설도입니다. 능침의 모습은 정식 왕릉이 아닌 군 신분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추존되어 왕의 시호를 받아도 왕이나 왕비의 신분으로 돌아가신 왕의 능과 같은 방식으로 꾸며주지 않는답니다.
▼ 영월장릉의 매표소를 지나면, 단종역사관이 있습니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 역사관의 입구에는 왕이 앉아서 공식행사를 하던 어좌가 있는데, 기념사진용으로 만들어 놓은것 입니다.
▼ 1층 기념관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단종에 대해서 년도별로 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 1441년(세종23년) 경복궁 자선당에서 출생(자선당은 동궁),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의 의해서 자람)
- 1448년(세종30년) 왕세손 책봉(7세)
-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12세)
- 1453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
- 1455년 왕의 자리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함(상왕이 됨)
- 1456년 사육신의 복위계획, 장인 송현수의 복위계획이 발각되어 실패함
- 1457년 6월 (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됨
- 1457년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남.
▼ 정순왕후는 여산송씨이며 묘는 사릉으로 양주에 있습니다.
▼ 단종은 1452년 부왕인 문종이 승하하자 12살의 어린나이에 등극하였습니다만, 1455년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서 선위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1457년 사육신이 상왕복위 계획이 들켜서 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1457년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납니다.
▼ 노산군(단종)이 경복궁에서 출발한지 7일만에 영월에 도착했는데, 무척 빠르게 이동을 한것입니다.
▼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한지 두달만에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거처를 옯겼지만 금성대군(세조동생)이 노산군을 왕위로 복위시키는 계획이 탄로나서, 금성대군도 죽임을 당하고, 노산군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 낙촌비각의 모습입니다, 가을의 색이 비각에 물들었습니다. 설명은 아래 사진이 있습니다.
▼ 박충원은 사후 문경공이라는 시호를 받습니다
▼ 단종역관을 지나서 바라보는 재실의 건물 모습입니다.
▼ 재실의 모습은 다른 릉의 재실모습과 비슷합니다.
▼ 영월장릉의 재실은 문이 두개입니다.
▼ 재실에서 나와서 바라보는 매표소 방향의 모습입니다
▼ 정문(旌門; 홍살문)이 있는 엄흥도 정려각입니다. 영조2년(1726)에 에 만들어졌습니다. 정려각은 보통 충신을 기리기 위해서 만드는 비석의 보호각으로, 민간에서 효자를 기리는 비석인 경우에는 효자각이라고 합니다.
▼ 엄흥도 정려각은 영조2년(1726)에 어명에 의하여 지어졌다고 합니다.
▼ 가을 단풍에 충신의 정려각은 가을색에 물들어 갑니다.
▼ 장판옥앞에서 보는 장릉의 유래입니다. 단종의 생애와 장릉의 조성과정들을 알 수 있습니다.
▼ 장판옥뒤로 멀리 단종의 능침이 있습니다.
▼ 단종을 위해서 힘쓴 여인들 6인의 위패인데, 궁녀와 무녀의 이름도 보입니다.
▼ 충신위 32인의 위패입니다
▼ 충신위 위패에는 오른쪽에 안평대군 금성대군의 이름도 보입니다.
▼ 조사위 186인의 위패라는데, 계유정난때와 안평대군사건때 이렇게나 많이 죽였다니, 그야말로 세조는 피바람을 일으켜 단종의 자리를 빼앗은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 배식단입니다. 단종제향때 장판옥에 모셔져 있는 위패의 적힌 사람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랍니다.
▼ 조금 빈약하게 보이는 홍살문으로 참도를 바라봅니다.
▼ 정자각, 수라간, 비각이 보이고, 능선에는 단종의 릉이 보입니다
▼ 영천의 보호담장입니다.
▼ 영천의 물이 어느정도인가 보니 물이 꽤 고여 있었습니다.
▼ 홍살문에서 뻗어온 참도는 영천앞에서 꺽여져 정자각으로 이어집니다.
▼ 정자각 서쪽에 있는 예감에 다른릉에서는 못보던 평석이 보이는데, 용도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정자각의 여러 모습을 올립니다
▼ 향계의 계단에는 소맷돌은 없습니다.
▼ 장릉비각에 있는 묘표의 자료사진을 올립니다
묘표전면: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묘표후면
단종대왕 휘 는 문종대왕의 적자로, 모비는 현덕왕후 권씨이고 정통년간 신유년(세종23, 1441) 7월 23일에 탄생하였다. 왕은 무진년(세종30, 1448)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경태년간 경오년(문종즉위, 1450)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임신년(문종2, 1452) 5월에 문종대왕이 승하하자 대위를 이어 등극했다가 을해년(세조1, 1455)에 상왕으로 오르자 ‘공의 온문’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천순년간 정축년(세조3, 1457)에 왕이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가 이해 10월 24일에 승하하니, 춘추는 17세였고 영월군 북쪽 신좌을향(서북서쪽을 등지고 동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숙종 24년인 무인년(1698)에 왕에게 ‘공의온문 순정 안장 경순 돈효 대왕’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내리고 묘호는 ‘단종’, 능호는 ‘장릉’이라 하였으며, 영녕전에 부묘하였다.
금상(영조) 9년인 계축년(영조9, 1733)에 능에 표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 능침으로 올라가는길에 내려다 보는 모습입니다.
▼ 단종 능침의 모습입니다
▼ 문석인만 있고, 무석인은 없습니다. 추존왕들의 일반적인 능침의 모습입니다.
▼ 능침 뒤로는 자세하게 볼 수가 없어서 자료사진을 꾸며 보았습니다.
▼ 이제 능침을 내려갑니다.
▼ 충의공 엄흥도의 기념관인데,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왕릉.태실.원.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성 제릉(齊陵)-태조원비 신의황후[단릉] (0) | 2018.12.12 |
---|---|
양주 온릉(溫陵)-11대 중종원비 단경왕후[단릉] (0) | 2018.12.09 |
김포 장릉(章陵)-인조 사친 원종.인헌왕후[쌍릉] (0) | 2018.12.03 |
고양 서오릉(6부)-대빈묘,수경원,순창원 (0) | 2018.11.24 |
고양 서오릉(5부)-홍릉(弘陵)-영조 원비 정성왕후[단릉] (0) | 201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