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서오릉에는 왕이나, 왕비의릉 외에도 희빈장씨의 대빈묘, 영종의 후궁 영빈이씨의 묘,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묘가 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위세를 떨치던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가 어쩌다 묘에 묻히는 신분으로 되었을까, 깊고 깊은 궁궐에서 벌어지는 피눈물나는 암투가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원래는 광주에 있었으나, 1969년 이곳 서오릉으로 이장 하였습니다.
▼ 숙종의 후궁으로 되어 있는 희빈장씨 계보도 입니다.
▼ 희빈 장씨의 대빈묘는 서오릉의 서쪽에 있습니다.
▼ 대빈묘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모습으로 후궁의 묘 입니다.
▼ 능침에는 문인석과 장명등, 망주석, 혼유석과 표석이 있고, 봉분에 곡장은 있으나, 석양이나, 석호는 없습니다.
제20대 경종 사친 옥산부대빈 장씨 대빈묘(大嬪墓)
- 묘의 구성
대빈묘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사친인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묘이다. 대빈묘는 후궁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 묘표석을 배치하였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곡장을 둘렀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유명조선국 옥산부대빈장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묘의 역사
1701년(숙종 27)에 희빈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진(自盡)),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양주 인장리(현 구리시 인창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719년(숙종 45)에 광주 진해촌(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묘소를 서오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야기
옥산부대빈 장씨(재세 :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는 본관이 인동인 옥산부원군 장형과 파산부부인 윤씨의 딸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났다. 숙종대의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 12)에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 후궁)이 되었다. 소의(昭儀)의 품계에서 1688년(숙종 14)에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이 되었다.
숙종은 희빈이 낳은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한다는 뜻을 밝히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 일로 인해 기사환국이 발생되어 남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숙종은 환국 이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 인현왕후 복위 운동과 숙빈 최씨 독살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갑술환국이 발생되어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희빈은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를 무고한 혐의(무고의 옥)가 밝혀져 자진하였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1722년(경종 2)에 왕의 사친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사당의 이름은 대빈궁, 묘소의 이름을 대빈묘라 하였다.
▼ 추존 장조 사친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 즉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원입니다.
▼ 영조가 가장 사랑한 후궁 영빈이씨는 사도세자 외에도 옹주만 6녀를 두었습니다.
▼ 수경원은 숙종의 명릉과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 사이에 있습니다.
추존 장조 사친 영빈 이씨 수경원(綏慶園)
- 원의 구성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장조의 사친인 영빈 이씨의 원이다. 수경원은 처음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가, 1899년(광무 3)에 수경원으로 높여지자, 원의 형식에 맞게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이후 수경원은 1970년에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입구에는 대한제국때 세운 원표석이 있고, 원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원의 역사
1764년(영조 40)에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으로 추존되어 원호를 수경원이라 하였다. 이후 1970년에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이야기
영빈 이씨(재세 : 1696년 음력 7월 18일 ~ 1764년 음력 7월 26일)는 본관이 전의인 증 찬성 이유번과 한양김씨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에 입궁하여 궁녀생활을 하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책봉되었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후궁으로 영조 사이에서 1남(사도세자) 6녀를 낳았다. 사도세자의 생모였으나 아들에 대한 일을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며,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하였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강철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1764년(영조 40)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9년(광무 3)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 지위로 추존되어 시호를 소유(昭裕)라 하였다.
▼ 수경원의 역사를 보면, 사도세자의 사친인 영비 이씨가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신촌에 의열묘(義烈墓)라는 묘를 조성 하였다가, 정조12년(1788년)에 선희묘(宣禧墓)로 고쳤고, 고종36년(1899년)에 수경원으로 격상되었습니다. 1970년 서오릉으로 이장되었습니다
▼ 수경원을 천장 할때 정자각은 그대로 두고 왔다고 합니다. 수경원터는 경희대학교에 있습니다.
▼ 수경원의 표석인데, 비각은 현재 신촌 연세대학교 교내에 있고, 표석만 옮겨 왔습니다. 정자각과 비각이라도 그대로 옮겨 왔으면 좋겠습니다, 비석의 앞면에 대한 소유영빈수경원( 大韓 昭裕暎嬪 綏慶院)이라는 글씨는 광무3년(고종 36년)에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선희묘를 수경원으로 격상하며 만든 표석입니다.
▼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입니다. 하지만 공회빈의 묘는 비어 있다고 합니다.
▼ 순회세자는 명종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명종은 참으로 운이 없는 왕이였나 봅니다. 12살에 왕위에 올라 무서운 어미니 문정왕후(태릉) 밑에서 오랫동안 왕의 수업을 받았습니다만,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 순창원은 서오릉에 있으며, 네모로 위치를 표시하였습니다.
제13대 명종 원자 순회세자 · 공회빈 순창원(順昌園)
- 원의 구성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 원이다. 원소는 추존 덕종의 경릉(敬陵)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정자각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과 표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만 조성하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원의 역사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경릉(敬陵) 근처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공회빈 윤씨가 1592년(선조 25)에 세상을 떠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파천이 결정되면서 장례를 치루지 못하였다. 선조는 임시로 후원에 가매장의 명을 내리고 한양수복 후 공회빈의 시신을 찾으려 하였으나 끝끝내 찾지 못하였다. 왜란이 종결 된 후 겨우 신주를 만들어 봉안하였다. 1870년(고종 7)에 원호를 순창원(順昌園)이라 하였다.
순회세자(順懷世子) 이야기
순회세자(재세 : 1551년 음력 5월 28일 ~ 1563년 음력 9월 20일)는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원자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1557년(명종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61년(명종 16)에 가례를 올렸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恭懷嬪) 이야기
공회빈 윤씨(재세 : 1552년(?) ~ 1592년 음력 3월 3일)는 본관이 무송인 윤옥과 파평윤씨의 딸로 생년은 미상이나, 『선조수정실록』에 10세에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552년(명종 7)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561년(명종 16)에 순회세자의 빈으로 황대임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간택을 중단하고, 대신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63년(명종 18)에 순회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덕빈(德嬪)의 칭호를 받았다. 이 후 1592년(선조 25)에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순창원의 정자각은 모양은 왕릉의 정자각과 같지만, 규모가 작게 만들어졌습니다.
▼ 제13대 명종 원자 순회세자와 · 공회빈의 합장묘의 자료사진입니다. 공회빈은 임진왜란때 세상을 떠나, 급하게 궁궐안에 가매장 하고 , 왜란이 끝난후에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찾지를 못하여, 순회세자의 옆에 빈재궁(관)만 안치했다고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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