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왕중에 원종(元宗) 이라는 왕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김포에는 왕릉이 하나 있는데, 장릉(章陵)이라고 하며 원종과 인헌왕후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원종(元宗)이 누구인가 하면 16대 인조의 사친이며, 선조와 인빈김씨의 셋째 아들 정원군 입니다. 정원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형제였습니다. 정원군의 아들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조선의 16대 임금이 되자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서 부모를 왕과 왕후로 추존 하였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추존왕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아 조선 16대 왕 인조로 즉위하자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9년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고 선왕인 광해군이 폐위된 터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여기서 추존왕 원종이 누구인가를 계보도를 보면서 알아 보겠습니다. 원종은 선조와 인빈김씨의 3남으로 정원군 입니다.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의 글을 보면 선조의 아들중에서 조선의 3대 싸이코가 있었는데, 정원군, 임해군, 순화군이었습니다.
※ 선조는 윗대 왕보다는 자식은 많이 두었으나, 자식사랑이 삐뚤어져서 백성의 원한이 많았으니, 조선 최대의 망나니 임해군/정원군/순화군은 왕족의 본분을 잊은채 구타 강간, 살인등을 일삼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싸이코패스 였습니다.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여 세자자리를 동생인 광해군에 밀렸으며, 임진왜란때는 함경도 회령에서 순화군과 함께 왜군에 포로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곀기도 했었습니다만, 사실은 못된짓을 많이 하니까 백성들이 왜군들 한테 넘긴것이라고 하니, 죽어도 쌉니다 . 광해군 즉위후 역모죄로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 되었습니다.
인빈 김씨에서 생산된 정원군(추존 원종;인조 사친)은 성품이 포악하고, 방탕하여 탄핵을 많이 당했는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광해군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을 역모에 엮여서 죽이고, 살던 집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고 그 자신도 홧병으로 얼마 못 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차남 능양군이 반정에 가담해 결국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인조가 되었습니다. 조선최대의 망나니 정원군의 아들을 반정세력이 사람을 잘못 찍은 것 입니다.
순화군은 순빈 김씨의 외동 아들인데, 구타 살인, 갈취등 저잣거리의 양아치들이나 하는 못된짓을 하여 유배를 당하기도 했으며, 선조가 그때마다 풀어주었으나, 못된 성정을 버리고 못하고 풍에 맞아 사망했다고 합니다.
▼ 김포에 단 하나 있는 왕릉인 장릉의 입구 입니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되자 역사문화관 건물을 지은듯 합니다.
▼ 역사문화관에는 꼭 들렸다 가야 합니다. 능주의 생애와 역사적인 상황, 능의 조성과정들을 잘 보여 줍니다.
▼ 무인석과 문인석의 모형입니다.
▼ 역사문화관 내부의 자료는 많지만, 사진으로 담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보기만 했습니다.
▼ 역사문화관를 나와서 숲길을 걸으면서 재실방향으로 갑니다
▼ 재실은 옛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듯 했습니다
▼ 왕릉에는 연지가 하나씩은 있습니다. 천원지방(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다)사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 신들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금천교를 건넙니다
▼ 장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 가는 길이 경사가 있는데, 자연 그대로 향로와 어로를 만들었습니다.
▼ 정자각의 여러 모습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 운계의 소맷돌 문양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보통 구름이나, 꽃잎문양을 새기는데, 무슨 문양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입니다.
▼ 배례청에서 바라보는 능침인데,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서 좀더 가까이 능침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질 것 입니다.
▼ 신도가 보통은 사초지 끝에까지만 이어져 있는데, 장릉의 신도는 사초지 안까지 박석이 깔려 있습니다.
▼ 예감이나 산신석상이 많이 묻혀 있습니다. 오랫동안 토사가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예감이 깊이 묻혀 보입니다.
▼ 능침에는 쌍릉으로 되어 있고, 문무석이 있는데, 올라가서 볼 수 없으니 자료사진으로 봐야 합니다.
▼ 봉분을 둘러싼 호석이 색다르게 보입니다. 다른 릉의 호석과는 모양이 많이 다릅니다.
▼ 망주석의 세호도 비교적 그대로 있고, 장명등의 문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 망주석의 세호 입니다. 완전하게 호랑이를 묘사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선 전기의 능과는 다르게 문양이 세밀하게 조작되어 있습니다
▼ 왕릉의 문석인과 무석인의 각각 둘씩 세어져 있는데, 대표적인 자료사진만 모아 보았습니다
▼ 석호와 석영도 각각 한쌍씩 골라보았습니다.
▼ 석양과 석호의 얼굴모습인데, 양의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 비각의 모습입니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의 비석 받침돌이 있습니다.
▼ 비각 안에는 표석이 있는데 자료사진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묘표 전면 :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부좌
묘표 후면 :
원종 공량 경덕 인헌 정목 장효대왕은 만력 8년인 경진년(선조13, 1580) 6월 22일에 탄생하였다. 기미년(광해11, 1619) 12월 29일에 승하하여 경신년(1620) 2월에 양주 군장리에 장사지냈다가 천계 7년인 정묘년(인조5, 1627) 8월 27일에 김포군의 뒷산 자좌(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니, 향년은 40세이다. 정해년(선조20, 1587)에 처음 정원군에 봉해지고 인조가 즉위하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가 숭정 5년인 임신년(인조10, 1632)에 다시 왕으로 추숭되니, 명나라에서 ‘공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 경의 정정 인헌왕후 구씨는 만력 6년인 무인년(선조11, 1578) 4월 17일에 탄생하였다. 천계 6년인 병인년(인조4, 1626) 정월 14일에 승하하여 5월 18일에 원종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49세이다. 경인년(선조23, 1590)에 처음 군부인에 봉해지고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으로 봉호가 올랐으며 숭정 5년인 임신년(인조10, 1632)에 왕후로 추숭되었다.
숭정 기원후 126년(영조29, 1753)에 세우다.
▼ 비각 옆에 있는 비석 받침돌인데, 무척 화려합니다. 이런 화려한 받침돌이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니, 후세에라도 이렇게 나타나 준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 가을이 깊어 가는 김포장릉입니다. 김포장릉은 외진곳에 있어서 그나마 개발의 광풍을 벗어나서 왕릉주위에 도시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스럽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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