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보면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밀어내지 않고, 광해군이 그대로 왕좌에 있었다면, 청나라에서 두번씩이나 조선을 짓밝고, 조선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을 하지도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광해군이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왼쪽에는 광해군의 묘와 오른쪽은 문성군 부인 류씨의 묘입니다. 묘표와 상석의 상태가 아주 좋아 보이는 데, 문화재 보존처리 작업이 실시된듯 합니다.
▼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쫒겨나기는 했지만, 죽임을 당하지도 않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서 6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과유불급 [過猶不及] 이라는 말이 새삼 생각이 나는 광해군의 폭주정치였습니다
묘의 구성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류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왕자 묘제의 예로 조성되었다. 쌍분의 형태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광해군묘, 오른쪽이 문성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있다.
묘의 역사
1623년(인조 1)에 문성군부인 류씨가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음력 윤10월 29일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먼저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641년(인조 19)에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10월 4일에 문성군부인 묘 우측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이야기
광해군(재세 : 1575년 음력 4월 26일 ~ 1641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608년 음력 2월 2일 ~ 1623년 음력 3월 13일)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에 태어났다. 광해군에 책봉된 후,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가 된 후엔 남도로 내려가 왜군을 무찔러 왜란의 승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왜란이 종결된 후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인목왕후가 간택 된 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왕세자의 지위가 위협 받기도 하였으나,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의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사직을 중건하였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으로 친형 임해군을 죽였고, 붕당정치에 휘말려 계축옥사 등의 여러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을 배척한 세력(소북)과 영창대군을 죽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인목왕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들이 1623년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고, 1641년(인조 19)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이야기
문성군부인 류씨(재세 : 1576년 음력 7월 21일 ~ 1623년 음력 10월 8일)는 본관이 문화인 문양부원군 류자신과 봉원부부인 정씨의 딸로 1576년(선조 9)에 태어나, 선조의 왕자 광해군과 결혼하여 문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에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광해군 사이에서 3남을 낳았으며, 1622년(광해 14)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문성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에 강화도 유배지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 광해군묘는 일반 왕자묘제에 맞게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료사진을 보면 석물들이 대부분 검은때가 없고, 하얗게 깨끗합니다. 문화재청에서 보존처리를 한것 같습니다. 문화재 보존처리 기술은 한국인의 솜씨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 오래된 자료사진입니다.
▼ 광해군묘는 좌우로 가각 1기씩 문인석이 있는데, 비바람에 마모가 심해졌습니다
▼ 망주석과 장명등도 오랜세월 많이도 마모가 되었습니다
▼ 아무리 군으로 강봉된 광해군의 묘라지만, 무너져 내리는 묘를 보면 광해군만도 못한 대군들의 무덤이나, 같지도 않은 무공좀 세웠다고 하는 장군들의 묘를 보면서, 좀 너무 푸대접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다음은 선조와의 사이에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은 사친 공빈 김씨와, 묘인 성묘(成墓)에 대해서 알아 봤습니다, 성묘는 남양주에 있으며. 공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으며, 둘째 아들이 광해군입니다.
제15대 광해군 사친 공빈 김씨 성묘(成墓)
-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12-8 (송능리 산 55)
- 묘의 형식 : 단분
- 묘의 조성 : 1577년(선조 10), 1610년(광해 2)
- 성묘의 구성
성묘는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의 사친인 공빈 김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왕릉제도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공빈 김씨가 1610년(광해 2)에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면서 성릉(成陵)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이다.
성릉으로 추봉된 이후에 왕릉의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여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과 호석을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 성묘의 역사
1577년(선조 10)에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풍양 조씨 시조묘소 뒤인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610년(광해 2)에 공빈 김씨가 공성왕후로 추존되자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석물을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어 현재의 성묘(成墓)가 되었다.
공빈 김씨(恭嬪 金氏) 이야기
공빈 김씨(재세 : 1553년 음력 10월 11일 ~ 1577년 음력 5월 27일)는 본관이 김해인 해령부원군 김희철의 딸로 1553년(명종 8)에 태어났다. 선조 즉위 후 선조의 후궁이 되어 1572년(선조 5)에 임해군을, 1575년(선조 8)에 광해군을 낳았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즉위 후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는 일에 힘을 썼다. 하지만 광해군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의 양자입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신들은 공빈 추존을 반대하였다. 광해군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10년(광해 2)에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휘호를 자숙 단인(慈淑 端仁), 능호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였다. 그 후 1615년(광해 7)에 명나라의 왕후추존고명을 받았고, 신주를 종묘 선조실에 부묘하였다. 이로써 광해군은 후궁 소생이 아닌 왕후 소생이 되었으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의 모든 호칭을 폐하여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 공빈 김씨의 성묘를 보면 완전한 릉의 모습입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난후 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 하였습니다만, 광해군이 하야하고 난후 다시 성릉도 다시 성묘로 강봉되었습니다, 능제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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