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의 원통전 뒤편에 있는 혜소국사비와 비의 주인인 혜소국사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혜소국사비는 현재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씨에서는 고려인다운 뛰어난 풍모가 느껴진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_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명   칭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399-18(칠장사)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분   류 : 국가지정 보물(제488호)

□ 시   대 : 고려전기(문종14년, 서기1060년)


▼ 칠장사 혜소국사비는 비각 안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비각은 1975년도에 세워졌습니다

 

□ 여러 자료에는 혜소국사에 대한 내용이 다양하게 나오는데, 중요한 내용만 추려 보았습니다.

- 혜소국사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3년(972)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삭발 입산하였다

- 17세 때 칠장사에서 융철(瀜哲)의 가르침을 받았고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그 뒤 미륵사(彌勒寺)를 거쳐 칠장사로 돌아왔으며 999년 28세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 고려 덕종(德宗 : 1032-1034)대에는 승통(僧統)이 되어 현황사(玄化寺)에 있기도 하였다

- 고려 文宗 8년(1054) 11월 15일 향년 83세로 칠장사에서 입적하였다.

- 문종이 절 남쪽 산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시호를 혜소국사라 내렸다.

 

□ 비석에 대한 내용입니다.

 - 비석은 입적 후 6년 후인 1060년에 세웠고, 흑대리석으로 된 이 비는, 비신 높이 3.48m, 폭 1.28m이다

- 비문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다.(비문은 朝鮮金石總覽에 있다).

- 전액(篆額)은 증익혜소국사비명(贈謚慧炤國師碑銘), 8자를 횡2단으로 身石上部에 刻字하였다

- 이 비는 비신 중앙부가 절단된 것을 1975년 비각을 지으면서 혜소국사비도 보수하였다

 

▼ 비석은 현재 보호각 속에 귀부, 비신, 이수 등을 각각 따로 분리하여 세워놓았다. 화강암인 이수가 무거워 비신에 올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봅니다. 보호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75년에 세워졌다.

▼ 보호각 내부에는 비신(碑身)이 귀부(龜趺)에 올려져 있지 않고, 다른 비좌(碑座)에 세워져 있는데, 이 비좌는 비신을 고정시키기 위해 따로 만든것이며, 귀부에 올리지 않은것은 비신이 넘어질것을 우려해서 따로 고정 시킨것으로 보입니다.

▼ 비문의 내용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忠會)에게 구법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安城七長寺慧炤國師碑))]

 

▼ 혜소국사비를 탁본한 일부 사진입니다_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자세한 비문 내용은 한국금석문총람에 있습니다

 

▼ 한편, 비석이 깨어진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기요마사가 이 절에 왔는데,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노승의 목을 베었는데 노승은 사라지고 자신의 팔만 저렸다고 한다. 나중에 비전(碑殿) 앞에 가보니 혜소국사비가 토막 나 있었다고 전한다.

 

▼ 비신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측면에 조각을 한 것인데, 흔히 보는 모양은 아닙니다.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서로 엉켜있는 형태를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는데, 이는 비문을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귀부의 머리는 거북이 모양인데, 모습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훼손되고 마모된 것 없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입니다

 

▼ 이수(螭首)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을 조각하였고, 귀부에 비하여 훨씬 세련된 조각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윗면에는 용이 한 마리 더 있고, 그 위로 원판형 이상한 석재가 올려져 있는데 원래 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들의 비를 보면 보통 승탑비라고 하면서 어딘가에 승탑(부도)이 따로 있는데, 혜소국사의 승탑은 없는듯 합니다. 만약 승탑이 있다면 비의 이름은 혜소국사승탑비가 되었을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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