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봉업사지(安城奉業寺址)는 경기도기념물 제18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5번지 일대에 있는 농경지로 구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비봉산과 죽주산성 아래에 있는 농경지 일대에 있는데, 즉 폐사지(봉업사지)가 어느때인가 논으로 변해서 벼농사를 짓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고려시대 폐사지는 대부분 농경지로 바뀐 사례가 많습니다

 

봉업사지는 본격적인 발굴전에는 죽산리사지로 알려져 왔는데, 발굴 유물에서 화차사(華次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와 봉업사(奉業寺)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발굴되면서 통일신라 시대에는 화차사였다가 고려시대에 봉업사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성 봉업사지에는 두개의 문화재가 있는데, 같은 장소인데도 장소 명칭은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 당간지주 : 안성 죽산리당간지주 (안성 봉업사지당간지주라고 해야 좋을 듯합니다)

※ 오층석탑 : 안성 봉업사지오층석탑

 

□ 문화재청에서 봉업사지의 설명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안성시 비봉산 아래 죽산면 죽산리에 있다. 봉업사의 창건이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에 1363년에 공민왕이 봉업사에서 고려 태조의 영정에 배알 했다는 내용이 있다.

봉업사지는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목탑지를 비롯하여 고려 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지와 부속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 ‘華次寺(화차사)’라고 쓰인 8-9세기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봉업사의 원래 명칭은 화차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이 봉업사지라는 것은 1966년에 경지정리 작업 중 출토된 향완과 반자에 새겨진 명문 때문이다. 향완(불단에 올리는 향로)과 반자(금속제 타악기)의 발견으로 고려사에 나오는 죽주의 봉업사(奉業寺)가 현재의 봉업사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봉업사지에서는 명문 기와와 막새․청자․중국 자기류․ 불상편․불구류 등이 출토되어 사세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봉업사에 석탑만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봉업사는 조선 전기에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_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저 멀리 뒤로 보이는 죽주산성 아래 벌판에는 석재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간지주가 석탑과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사찰의 초입에 세우는데 사찰안에 당간지주가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 당간지주 앞에는 봉업사(지)의 내력을 적은 안내문이 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에 화차사로 창건하였다가 고려시대 때는 봉업사로 유명한 사원이었으나, 조성 중종 때인 1530년의 기록에는 이미 봉업사가 없어졌다는 내용입니다.

 

▼ 죽산리 일대의 봉업사지 인근의 농경지 모습입니다. 자료사진에 보이는 농경지의 반쯤은 봉업사지였을것 으로 보입니다. 다른 곳은 대부분 네모 반듯하게 경지정리가 되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경지정리가 안되어 있고, 옛날 농경지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경지정리한다고 중장비로 논박닥을 파 헤치면 알 수 없게 묻혀 있던 봉업사지의 문화재, 유구들이 전부 망가질 것을 우려해서 경지정리를 안 한 것 같습니다.

 

▼ 1966년 농경지 정리 작업 중에 유물이 출토되면서 석탑 주의를 발굴 조사하던 때의 자료사진이며, 발굴 시기는 1997년에서 2004년 사이로 총 3번의 발굴조사가 있었습니다.

발굴조사 후 유구 보존을 위해서 흙으로 덮어 두었습니다.

 

발굴조사 때 발견된 청자와 명문이 있는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던 화차사였으며, 고려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사원(眞殿寺院)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사원은 논산의 개태사가 있었습니다.

 

▼ 또한 발굴조사 중에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된 청동향로(향완)와 예불을 드릴 때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북(반자)이 발굴되었고, 화차사(華次寺)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도 발견되었습니다.

봉업사명 청동 향로 (奉業寺銘 靑銅 香爐)

경기도 안성의 고려시대 절터인 봉업사지 출토로 전해지는 대형의 이 향로는 몸체[노신(爐身)]와 덮개[개부(蓋部)], 그리고 기대(器臺) 부분에 삼족(三足)의 받침을 지닌 특수한 형태이다. 몸체 구연부의 넓은 전을 지닌 고려시대 향완보다 좀 더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형태로 추정된다.

향로의 중간 부분은 고려시대의 향완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며 보주(寶珠)가 달린 뚜껑이나 세발이 달린 원형의 대좌는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감과 장중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구성한다. 덮개부의 불꽃 형상 보주는 사리기에 나타나는 정교한 화염보주(火焰寶珠) 형태로서 도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덮개부에는 ‘봉업사삼중대사원준(奉業寺三重大師元준)’이란 점열로 새긴 명문이 있는데 이는 봉업사의 원준대사가 직접 만들었다기보다는 원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며, 받침 부분의 ‘중념육근(중卄六斤)’의 명문은 향로 주조에 구리 26근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의해 고려 초의 사찰이었던 봉업사에서 제작한 고려 전기의 향로로서 조형미가 매우 뛰어난 걸작이다. _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또 다른 문화재가 봉업사지에 있다가 죽산중학교를 거쳐서 안성 칠장사로 옮겨 갔는데, 보물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 입니다. 칠장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습니다.


-  다음은 봉업사지당간지주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

 

현재 당간지주는 5층 석탑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원위치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간지주 안쪽 면에 별다른 흔적은 없으며, 꼭대기에 사각형으로 판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할 때 연결하는 간을 끼우도록 했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봉업사를 크게 중창할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보여,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기단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 시대 들어와 세련되고 장식적인 외관보다는 안정적이고 기능에 충실한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명   칭 : 안성죽산리당간지주 (安城竹山里幢竿支株)--> 안성 봉업사지당간지주로 변경해야 하는것 아닌가?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728번지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로 추정

□ 분   류 : 경기도 유형문화재(제89호)

□ 시   대 : 고려 전기

 

▼ 경기문화재단에서 자세한 설명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기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일컫는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대사찰이었던 봉업사지(奉業寺址)의 당간지주로 안성죽산리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약 30m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원래 이곳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는데, 남쪽 돌기둥은 윗부분의 4분의 1 정도가 이미 깨진 상태이다. 돌기둥은 표면이 거칠고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꼭대기의 바깥쪽 모서리를 둥글려 완만하게 다듬었다.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파놓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같은 시대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 두 개의 지주가 세워져서 당간지주가 되고 지주 사이에 당간을 세우는데, 당간 받침돌인, 간대가 안 보입니다. 땅속에 묻힌 것이지, 아니면 당간지주를 딴 곳에서 옮겨 오면서 간대를 두고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를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봉업사지의 당간지주에는 이 간대가 없습니다.

 

▼ 자료에서 이 당간지주는 왼쪽의 지주 하나가 넘어져 있어서, 1980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상단의 당간을 고정시키던 간구가 일부 깨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투박하게 보이며, 지주면에 명문은 없다고 합니다.


- 다음은 봉업사지오층석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 당간지주 위쪽(서북쪽)으로 약 30미터 떨어진 곳에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경기도 지방에서는 가장 큰 석탑이라고 합니다.

 

석탑의 크기가 커서 그런지 1층 몸돌은 1장의 석재가 아닌 4장의 석재로 마치 기단부의 면석처럼 세웠고, 2층 몸돌은 두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3층, 4층, 5층의 몸돌은 1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몸 돌마다 우주가 가볍게 새겨져 있습니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아서 모양만 새기는 형식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문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붕돌(옥개석)의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추켜올림(반전)도 미미하며, 상륜부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탑의 양식은 전체적으로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1968년 복원 공사 때 4층 옥신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고, 유물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명   칭 :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728번지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분   류 : 국가지정 보물(제435호)

□ 시   대 : 고려 전기

 

▼ 북쪽으로 대몽항쟁의 역사적 승리의 상징인 죽주산성이 보입니다. 죽주산성은 1236년(고려,고종 23)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몽골군의 3차 침입 때 15일간 전투를 펼쳐서 승리한 곳입니다.

 

몽골군은 총 9차례나 고려 국토를 휩 쓸고 다녔습니다. 결국은 무신들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

 

▼ 비봉산 방향으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1968년 탑을 복원공사를 할 때 탑의 4층 몸돌에서 사리병이 나왔습니다.

 

▼ 4층 몸돌에서 두 개의 병이 나왔는데, 하나는 사리병이고, 다른 하나는 무슨 병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세월 몸돌 속에 있다가 다행히 도굴되지 않고, 1968년 발굴 때 나와줘서 아주 다행입니다.

▼ 거대한 석탑으로 일반석탑과는 다르게 기단부부터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서 결구하였습니다. 거대한 크기로 보기에는 투박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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