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의 칠장사는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인 된 것은 없다고 하며, 다만 칠장사가 신라말기에도 사찰이 운영 되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려전기 현종(제8대,재위:1009~1031) 5년때(1014), 혜소국사(慧炤國師 : 972~1054)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중창사를 보면,

- 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왜구가 사찰을 전소시킴.

- 조선 연산군(燕山君) 원년(1495)에 중건(창건 200년 후)

- 조선 중종(中宗) 원년(1506)에 흥정대사가 가람을 중건하였고,

- 조선 인조(仁祖)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願刹)로 삼아 크게 중창.

- 조선 현종(顯宗) 15년(1674) 당시 세도가들이 장지(葬地)로 쓰기 위하여 방화후, 초견대사가 건물들을 중건

- 조선 숙종(肅宗) 20년(1694)에 세도가들이 또다시 사찰을 불태웠다.

- 조선 숙종(肅宗) 30년(1704)에 석규대사가 대법당과 태청루 등의 건물을 중건

- 조선 영조(英祖) 원년(1725)에는 선진대사가 원통전을 세웠다.

- 조선 고종(高綜) 14년 부터 2년간(1877~1878)에 걸쳐 중건

- 이후에도 많은 건물의 세워졌고, 중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칠장사는 여러 설화가 전해지는데, 칠장사’와 `칠현산(七賢山)’이라는 이름도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임꺽정과, 박문수어사의 설화가 전해지기도 하며, 광해군의 권력집착에 의해 살해된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 : 1584~1632)가 계측옥사(1613)때 살해된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 : 1606~1614)과 친정 아버지 김제남(金悌男 : 1562~1613)에 대한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삼았던 유서 깊은 사찰 입니다.

 

칠장사는 다수의 문화재가 많아서, 불교문화재를 두루두루 볼 수 있고 가을이면 뒷산의 고운 가을색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절 입니다. 경기도 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칠장사로 들어 가는 길옆에 보면 철당간이 보입니다. 즉 여기서 부터가 칠장사의 경내라고 알리는 표시입니다. 철당간을 세운 기록은 없는데, 조선현종 12년에 사적비를 만들면서 철당간도 같이 세운것으로 봅니다.

 

돌로 만든 당간지주는 많이 보이지만, 철당간은 어지간해서는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철당간은 공주갑사,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등이 대표적입니다. 아래 보이는 작은 지주는 괘불지주인듯 싶은데, 서로 마주 보고 있지 않게 세워져 있습니다.

 

▼ 철당간 윗쪽으로는 칠장사의 사적비가 보이는데, 비신에는 朝鮮國竹山七賢山七長寺 重修香火史蹟碑銘(조선국죽산칠현산칠장사중수향화사적비명)大明崇禎四十四年 辛亥六月 日立(대명숭정44년신해6월일입)이라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시주, 화주자의 이름들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대명순정44년(1671년, 조선현종12)에 사적비를 건립하였고,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칠장사를 창건하였는데, 죽산 출신인 혜소국사의 유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건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 칠장사 일주문 앞에는 주차장이 있습니다만, 일주문을 지나서 조금 더 올가 가도 주차장이 또 있습니다.

 

▼ 일주문 옆으로 들어 갑니다. 일주문은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고, 1999년에 신축 하였다고 합니다. 일주문 현판의 글씨도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데, "칠현산칠장사"의 글씨를 쓰신분은 도광(道光)이라는 분이 썻습니다. 자료를 보니 칠장사에서 주지를 지내신 분이셨습니다.

 

▼ 일주문을 지나서 언덕길을 오르면 보이는 모습입니다.  조선시대때 지역 사대부들이 명당이라서 절에 불을 지르고 문중의 묘자리를 만들려고 했다니, 그것도 두번씩이나... 여러가지 설화를 지닌 유명한 절집이지만, 생각 보다는 고즈넉한 산속의 절집을 보는듯 합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칠현산칠장사의 모습입니다.(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음은 칠장사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칠장사의 설화입니다.

혜소국사가 칠장사에 머무를때 7도적과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일곱도적이 절에 와서 못된 짓 을 일삼고 하던 어느날 도적 한명이 절 약수터에서 물을 먹던중 물 박아지가 황금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몰래 품에 감추어 소굴에 돌아왔는데, 와서보니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하는 일을 당한다.

 

다음날에는 다른 도적이 또한 이와같은 일을 겪고, 다음날은 다른도적이 또한 같은 일을겪는 수수께기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진다. 7도적 모두가 이 같은 경험을 다 겪고 나서야 "이 일은 분명 혜소국사님이 도력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라 하여 바로 혜소국사에게 찾아가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한다. 이에 혜소국사는 흔쾌히 허락하자 7도적은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모두 훌륭한 아라한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설화다.

 

이때 부터 사람들이 칠장사가 속해있는 산을 아미산(蛾眉山)에서 일곱명의 현인을 뜻하는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부르고, 칠장사(漆長寺)도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칠장사에 기거하던 갓바치를 찾아온 임꺽정에게 절의 승려가 말타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말을 주었고. 임꺽정은 이 말의 이름을 칠장마(七長馬)라고 불렀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 칠장사의 주차장 앞에서 보면 누마루 형태의 건물이 보이는데, 보통 산사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누마루 밑의 계단을 통서 경내로 들어가는 것을 많이 보는데, 칠장사는 누마루를 우회해서 들어 갑니다. 앞에는 각종 현수막이 붙어 있어서 건물의 형태를 보려면 뒤로 돌아가서 봐야 합니다

 

▼ 경내에서 보는 누마루는 제중루입니다. 제중루는 단청을 하지 않아서 소박한 맛은 있지만, 현판은 화려한 금색이고, 제중루(濟衆樓)의 뜻을 보면,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는 누마루라는 뜻일 것 입니다만. 7인의 악인을 구제한 칠장사의 내력을  나타냈으며, 글씨를 쓰신분을 보니 도광(道光)스님이 썻습니다. 불기2547년에 쓴 글씨인데, 서기로 2003년 이네요.

 

▼ 칠장사 경내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이 좌측에 있습니다. 천왕문이며, 그리 크지 않은 나즈막한 건물인데, 이 건물 안에는 흙으로 만든 4대천왕이 있습니다.

문 좌/우측에 큼지막한 4장의 주련(柱聯)이 보이는데, 뜻을 한번 찾아 봤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봤습니다

 

四大天王威勢雄(사대천왕위세웅)

사대천왕 위세는 크고도 웅장하고,

 

護世巡遊處處通(호세순유처처통)

호세천왕 모든 곳에 곳곳 돌며 통하며,

 

從善有情貽福蔭(종선유정이복음)

선행하는 중생에겐 복덕을 내려주고,

 

罰惡群品賜災隆(벌악군품사재융)

악행하는 무리에겐 벌을 주고 재앙을 주네.                     

 

▼ 조선 영조때의 작품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 입니다. 흙으로 만들었는데도, 나무로 만든것 처럼 세밀함이 살아 있습니다.

 

▼ 다음은 칠장사의 화려한 단청을 칠한 범종루를 보겠습니다. 또다른 칠장사 범종(경기도 문화재)은 대웅전 안에 따로 있는데, 지금 보는 이 범종은 문화재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 범종루에서 보는 칠장사의 왼쪽 입니다.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전해져 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이야기등이 있습니다.

 

칠장사는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 관군들을 피해 머물던 곳이기도하며, 임꺽정의 스승인 병해대사(갖바치스님)를 만나 이봉학등과 의형제를 맺은 곳이기도 합니다.

병해대사(갖바치스님)는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쳐 가죽신이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 특산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칠장사는 SBS의 인기드라마 였던 임꺽정(1996~7년)의 촬영장소였습니다.

 

▼ 다음은 극락전을 보겠습니다. 건물의 형태가 일반적인 절집모양이 아니고, 무슨 전시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 극락전 앞에는 3점의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극락전 내부에 보관 되고 있는듯 합니다.

1)칠장사 오불회괘불탱, 2)칠장사 삼불회괘불탱, 3)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입니다.

 

 

▼ 극락전 안 꺽정불(칠장사 홈페이지에서 인용 하였습니다)

임꺽정이 봉안한 것으로 전해져 ‘꺽정불’로 불리고 있는 안성 칠장사 소장 목조불상이 충북대 연구팀의 연대측정결과 1540여 년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가운데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불상의 진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왔다.

 

그러나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 된다.

 

▼ 대웅전이 있는 큰마당으로 들어갑니다.

 

▼ 오른쪽의 종무소인데, 옛날 사진을 보면이 건물은 기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남쪽방향의 응향각 입니다. 글씨가 참 맛갈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석(志石)이 누구지?

 

▼ 대웅전앞의 삼층석탑은 "죽림리삼층석탑"이며, 원래는 죽림리 농장에 있다가 2005년 11월에 칠장사로 이전 하였으며, 고려전기의 탑으로 추정하며 경기도유형문화재 입니다.

 

▼ 대웅전옆에 있는 두기의 불상중 오른쪽이 문화재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식명칭은 "안성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 입니다. 1980년 죽산중학교에서 칠장사로 옮겨 왔습니다.

 

▼ 칠장사대웅전이며, 단청은 다 바랬지만, 건축미는 빼어난 보물입니다. 조선 정조14년(1790년) 중창되고 순조 28년(1828년)에 이건된 대웅전은  조선후기의 건축물로서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 칠장사 대웅전 안에는 영산회상도(경기도유형문화재), 목조석가삼존불좌상*경기도유형문화재)등이 있습니다

 

▼ 칠장사 대웅전 계단 양옆으로 괘불지주가 세워져 있는데, 큰법회 행사등을 할때, 괘불탱을 걸어두는 돌기둥입니다. 오른쪽 지주에는 명문이 있습니다. 대웅전앞의 괘불지주는 삼불회괘불탱을 걸어두는 지주라고 합니다. 지주 표면에 1725년(조선영조원년)에 지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대웅전 안에 있는 칠장사 범종은 경기도유형문화재로, 범종의 명문에 조선 정조6년(1782년)에 만들었습니다.

 

▼ 관음보살을 모신 칠장사 원통전 입니다. 관음전 이라고도 합니다. 조선후기의 사찰불전의 형식과 칸마다 다양한 단청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제370호 : 2021.9.2)로 지정되었습니다.

 

▼ 칠장사 원통전 내부의 관음보살좌상입니다_주간현대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칠장사 명부전 안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 인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일괄[安城 七長寺 木造地藏三尊像과 十王像 一括]은  시왕상과 권속을 포함한 나무 조각상입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명부전은 1726(영조 2)년에 사간(思侃)에 이해 건립되었습니다

조각상들은 지장보살상 연화 대좌 하단의 묵서명 및 시왕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하여 1706년(숙종 32)에 금문(金文), 청윤(淸允) 등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09년 6월 24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로 지정되었고, 칠장사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시왕상은 의좌상으로, 제1에서 제10 왕까지를 지장보살 좌우로 번갈아가며 봉안하였다.

한편 지장보살상의 복장에서는 1634년(인조 12) 본과 1677년(숙종 3) 본의 두 권의 『묘법연화경』권1 및 조선 후기의 의식집이 발견되었다.

 

□  다음은 문화재청에서 인용한 설명문입니다

 

명부전은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모두 열 명의 심판관이 죽은 이를 심판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한곳에 모신 전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절집이다.

‘칠장사 지장전’은 나무로 조각한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각각 5분씩, 모두 열 명의 시왕상을 함께 모신 곳이다. 민머리의 스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지장보살상의 좌우에는 젊은 스님 모습의 도명존자(道明尊者)와 귀신의 왕이라는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보좌한다.

 

시왕은 옷깃에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된 문관 복장에 모자를 쓴 모습으로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는데, 책이 얹혀 있는 모자를 쓴 상이 다섯 번째 시왕인 염라대왕이다. 그 사이사이에 시왕의 판결을 돕는 판관(判官; 손에 홀을 들고 서 있는 인물), 시왕의 판결을 받아 적거나 낭독하는 녹사(錄仕; 두루마리를 받든 인물), 죽음의 전령사인 사자(使者)가 서 있다.

 

저승사자는 무관 복장에 깃발을 들고 두 다리를 벌려 당당히 서있는 모습이다. 문 안 양쪽에는 절의 수문장격인 금강역사상(인왕상)이 큰 칼을 휘두르는 위협적인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연화대좌에 쓰여 있는 글씨와 시왕상에서 발견된 발원문(바라고 원하는 것을 적은 글)에서 1713년 2월 25일부터 5월 27일까지 제작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 국사전은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를 못 보았습니다. 자료에서 보면 인목대비, 혜소국사,자장율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국사당, 자장율사와, 혜소국사, 자장율사의 위패입니다(우리문화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위패의 모양을 보면 일반적인 위패의 모습이 아닌데, 불교에서 패는 전패(殿牌)와 불패(佛牌)로 구분이 되는데, 전패는 왕실의 안녕과 축원등의 내용이며, 불패는 부처 보살의 이름이 들어 가는데 일단 모양 부터가 다릅니다.

 

전패(殿牌)는 봉황, 용등의 모양으로 왕실을 나타내며, 불패(佛牌)는 일반적인 연꽃모양입니다.  왼쪽이 인목왕후 전패입니다.  재료는 나무를 다듬어서 만드는데, 대부분 장인승려가 만들었습니다.

 

▼ 공덕전과 승탑(부도)가 보이는 길로 들어가면 샘터가 있는데, 공덕전은 닫혀 있어서 보지 못했는데, 공덕전은 영각을 개축하였습니다

 

▼ 샘터 입구에서 바라보는 경내 모습입니다

 

▼ 해소국사비를 보관하는 비각이며, 내부에는 혜소국사비, 이수, 및 귀부가 분리되어 보관되고 있습니다.

 

▼ 나한전에는 일곱 도둑들의 설화가 전해지는데 일곱명의 도둑들이 혜소국사의 가르침을 받아서 모두 제자가 되었는데, 헤소국사가 열반에 들고 난후 일곱선사들도 사라졌고, 어느날 절 뒷편 너럭바위에 사람형상을 한 일곱개의 바위를 발견하여 정성스럽게 더 다듬어서 나한전에 모시었다고 합니다.

 

또한 영조때의 어사 박문수가 나한전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장원급제 하였다고 합니다. 수험생을 자식으로 둔 어머님들의 간절한 소원을 비는곳 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한전은 최근에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 다음은 칠장사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나한전과 박문수의 설화 입니다.

 

조선중기에 천안에 박문수라는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길에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게된다. 어머니의 말씀도 있으셨고 해서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나한님께 불공을 드린후 잠을 청했다.

 

신기하게도 그날밤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서 과거시험의 시제를 알려주며 총 8줄의 답안중 7줄을 가르쳐주고 나머지 한줄은 박문수 니가 알아서 써내라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일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내내 나한님이 가르쳐주신 글과 마지막 싯구를 생각하며 걸어 걸어 한양 과거시험장에 도착하여 시험을 보는데 과연 나한님이 가르쳐준 시제라 깜짝 놀라고 만다.

나한님이 알려준데로 7줄을 쓰며 나머지 한줄을 써내려 가는데 일필휘지라!

낙조토홍괘애산(落照吐紅掛碍山) : 넘어가는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는데,
한아척진백운간(寒鵝尺盡白雲間) : 찬하늘 갈가마귀는 자로재는듯 흰구름 사이로 날아가네
문진행객편응급(問津行客鞭應急) : 나루터를 묻는 나그네 말채찍은 빨라지고
심사귀승장불한(尋寺歸僧杖不閑) :절을 찾아 돌아오는 중의 지팡이는 한가하지 않구나
방목원중우대영(放牧園中牛帶影) :방목을 하는 들판에는 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망부대상첩저환(望夫臺上妾低환) : 남편을기다려 높은 누대위에 섰는 아내의 쪽그림자가 낮다
창연고목계남로(蒼然古木溪南路) : 푸른 고목이 들어선 냇가 남쪽 길에는,
단발초동농적환(短髮草童弄笛還) : 단발한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더라.

 

이 답안으로 박문수는 장원급제를 한다.

박문수가 나한님께 유과 공양을 올리고 기도한 덕에 나한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셨겠지만 그의 인품으로 보았을때 효성과 사람 됨됨이가 나한님도 감동받을 정도의 성품이라 나한님께서 큰 선물을 주신것일 것이다.

 

이곳 나한전은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치르러 가면서 칠장사에 머물던중 꿈에 나온 시제가 과거 시험에 그대로 나와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각으로서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수많은 학부모들이 이곳 나한전을 찾아 기도를 한다.

 

▼ 박문수(어사)의 초상화(보물) 입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새롭게 개축한 나한전의 내부 모습입니다. 바닥의 너럭바위 위에 마루를 깔았습니다. 수능일이 가까워 오거나 시험을 자식이 시험을 앞둔 부모님들께서 박문수 처럼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주로 하는 곳 입니다(칠장사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나한전 앞의 박문수 합격다리는 수많은 합격기원 수험생들의 리본이 빼곡 합니다

 

▼ 삼성각을 마지막으로 칠장사의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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