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죽산면 매산리에는 미륵당이라는 지명이 있고 보호담장 내부에는 거대한 미륵보살과 간신히 형태만 갖춘 석탑이 있습니다.

 

미륵당이 있던 자리는 매산리사지라고 하며, 발굴조사결과 절터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소량의 파편이 나왔지만, 더 이상의 자료는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안성과 용인의 지역이 고려시대에는 죽주(竹州)라는 큰 행정구역이 있었으며, 매산리지역은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서, 그 길목에 죽주산성이 있습니다

 

죽산면은 경기도의 경주라고 할 만큼 고려시대의 불교유물이 많은곳인데, 고려시대 죽주(竹州)지역의 호족은 신라의 왕족으로서, 고려창업을 도와 공신이었던 박기오(朴奇悟)가 죽주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면서 지금의 죽산박씨가 되었습니다


▼ 매산리 미륵당을 밖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미륵당 앞에는 짧은 진입로만 있는데, 여기다 주차하시는 분이 있는데, 미륵당앞의 좁디 좁은길에 주차 하지 마시고,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지방도로옆에 주차하고 잠깐 걸어 오시기 바랍니다.

 

▼ 지방도로옆(육교)에는 10여대의 승용차의 주차가 가능한 장소가 있습니다.

※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의 자세한 설명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매우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는 설명문입니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경기도 안성의 봉업사지 북동쪽 매산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고려시대 불교 조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조성 시기는 그동안 조선 후기 또는 고려 말기로 추정되었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고려 초기인 광종대 제작되었다는 점이 규명되었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970년(광종 21)경부터 만들기 시작한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원형(原型)이 되는 불상으로 제작 시기는 97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석조보살입상의 지리적 위치, 황제의 면류관과 비슷한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점, 광종대 집중적으로 중창된 봉업사지의 발굴조사 성과 등을 분석하면 그 구체적인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기 시작한 960년(광종 11)부터 963년(광종 14) 사이의 시기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조성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양식적인 친연성이 강하지만,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보살상이 황제가 착용하는 면류관과 닮은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점은 주목되는 특징이다. 보살상이 보관을 쓰는 경우 일반적으로 화려한 원통형 보관을 착용하는데, 보관 위에 면류관과 닮은 형태의 방형의 보개를 올려놓은 경우는 광종대 조성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후 이를 모방해 제작한 몇몇 보살상을 제외하면 면류관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면류관 형태의 보개를 착용한 불상은 고려 전기에 광종에 의해서 창안된 새로운 불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참고하면 광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류관을 착용한 황제이다. 광종은 치세기간 동안 전제정치를 단행하였고 호족세력의 숙청과 신진세력의 등용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그는 즉위 11년이 되는 960년,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고 본격적인 구신 숙청에 들어갔다. 광종은 즉위 직후부터 평택의 자미산성과 죽주, 충주, 제천을 연결하는 동선에 여러 사찰과 관방 유적을 신·증축하였는데, 이는 본격적인 호족 숙청을 시행하기에 앞서 그들의 반발에 대비하려는 조치였다.
광종이 특히 신경을 썼던 호족세력은 혜종과 정종의 외척이었던 진천과 청주의 호족들이었다.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위치한 곳은 광종이 조성한 관방유적과 사원을 연결한 동선의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고려시대에 전라도나 충청도 쪽에서 수도인 개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청주를 거쳐 이 석조보살입상이 세워져 있는 죽주산성 앞을 지나야만 했다.
또한, 경상도 쪽에서도 월악산의 하늘재나 죽령을 넘고 충주를 거쳐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이 있는 곳을 지나야만 개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즉 이 석조보살입상이 건립된 곳은 고려시대에 있어서 남부와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적 요충지였다.

 

광종은 황제라 칭하던 960년경 무렵에 호족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황제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만방에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선전 효과가 가장 좋은 장소에 그 의미를 반영한 석조보살입상을 건립하였다. 따라서 매산리 석조보살입상은 황즉불(皇卽佛) 사상이 반영된 불상이라는 점에서 역사·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매산리 석조보살입상(梅山里石造菩薩立像))]

▼ 미륵당이 석불입상의 보호각을 말하는것인지, 아니면 넓게 담장안의 전체를 말하는것이지 모르겠으나, 옛날에는 보호각만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미륵불은 동네어귀에서 보이는데, 매산리 미륵당 미륵불은 절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쌩뚱맞게 웬 석탑이 있는데, 그것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겨우 구색만 갖춘채 어정쩡하게 세워져 있어서 웬지 보기에 불편합니다.

 

▼ 매산리석불입상은 매산리 태평미륵불상(梅山里太平彌勒佛像)이라고도 하며, 미륵불이 있는 당우를 미륵당이라고 합니다

 

▼ 대형 미륵불은 고려 초기에 유행을 하였는데, 고려 광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고려 최초로 황제라 칭한 개혁군주였으며, 태평성대를 시대를 열었던 황제로서, 대형불상이 많이 만들어진 시대였습니다.

 

▼ 미륵불에 면류관의 보개를 얹은것은 아주 희귀한 사례입니다. 고려 광종때 스스로 황제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썻는데, 그때의 영향으로 미륵불에 면류관이 얹혀져 있었을 수도 있을것입니다.

 

▼ 미륵불이 워낙 크다 보니, 미륵당(보호각)도 높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미륵불의 높이만 5.6미터 입니다

 

- 태평미륵은 경기도유형문화재이며,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머리가 높고 그 위에 사각형의 보개(寶蓋)를 쓴 형태로 넓적한 상호(相好)에는 눈꼬리가 긴 반개한 눈, 삼각형의 짧은 코, 작은 입 등이 표현되었는데, 비례가 맞지 않아 괴이한 느낌을 준다.

 

양 귀는 볼에 밀착시키며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고 굵은 목에는 번뇌·업(業)·고난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왼쪽 어깨에서 소략한 옷주름이 오른쪽 겨드랑이로 흐르고 허벅지에서 아랫쪽으로 각각 4개의 U자형 의문(衣文)을 만들었다.

 

양 손목에는 팔찌를 착용하였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외장(外掌)하고 왼손은 복부에서 내장(內掌)하였다.

 

상호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 수법과 부조화(不調和),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거대함에서 오는 괴체감(怪體感) 등이 시대가 내려온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 역시 안성에 분포하는 다른 미륵과 더불어 이 지역 불교 신앙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_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명   칭 : 안성 매산리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미륵당길 32-2(매산리 366번지)

□ 분   류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7호(국가지정문화재 아니라니...)

□ 시   대 : 고려 초기(고려 광종 재위시기;925~975)


▼ 고려 초기에 유행하던 대형석불의 하나인 안성 매산리 미륵당석불입상입니다.5.6m로 무척 기다랗습니다.

고려초기에 조성된 대형석불은 1)대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보물). 2)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3)개태사 삼존불상등이 있습니다.

 

▼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보개를 얹은 모양으로 비례가 맞지 않아서, 마치 외계인을 보는듯 합니다. 눈과 눈썹에는 보정을 한듯 하며, 입술에도 붉은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보개도 연꽃무늬가 있습니다. 향로석은 원래부터 있었던것이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어색합니다 

 

▼ 뒷모습을 보니 머리와 불신을 붙인듯한 흔적이 보입니다. 화강암에 박힌 차돌이 마치 법의을 걸친듯한 모습이 우연이지만, 우연같지가 않습니다.

 

▼ 측면을 보면 하반신에 일부 깨진 흔적이 있는데, 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입니만,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보입니다.

 

▼ 머리에 쓴 보관은 처음 보는 모양인데, 혹시 고려 왕들이 쓰던 관모는 아닐까 하는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아진다" 라는 뜻이랍니다

 

▼ 미륵보살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후 인간세계로 나와서 용화수 아래에서 세번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미쳐 구체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보실입니다...

 

100년도 못사는 중생들에게 56억 7천만년 이라니...지구가 멸망을 해도 수백번은 멸망 할 까마득한 이야기 입니다.


▼ 태평미륵앞에 서 있는 이 탑은 미륵당 오층석탑이라고하며, 매산리오층석탑이라고도 합니다. 살짝 옆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1층을 제외한 2,3,4,5층의 탑신석은 없어졌고, 4층의 지붕돌(옥개석)도 결실 되었습니다.

건립연대는 993년이라고 하는데, 고려 성종12년이 됩니다.

 

▼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현재 탑지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년대는 993년(고려 성종12년)이고, 석탑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안성시향토유적 제20호 입니다.

 

▼ 옥개석은 4층이 없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깨지지 않은 옥개석의 처마를 보면 매우 아름답게 치켜 올렸습니다.

 

1층 몸돌은 옥개석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실하게 보이는데, 아무거나 끼워 맞춘것으로 보입니다. 이 탑은 어디에선가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 이 오층석탑은 다른 고려시대 석탑과는 많이 다른것이 탑의 규모가 매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제작이 되었는데 이 정도의 규모의 탑에 기단부의 면석을 통째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면석을 4개로 해서 받쳐 세우는것이 보통인데, 전체적으로 석재가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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