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로서, 큰 화강암 판석을 재료로 하여 조성한 고려시대의 여래입상이다. 규모가 크고 조각 기법이 우수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조약사여래상(石造藥師如來像) 중 하나로 보물 제536호로 지정되어 있다_이하 아산디지털문화대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길50번길 147-20[평촌리 1-1]


▼ 충청남도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는 용담사는 최근에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석불 주변에 있던 민가 형태의 대웅전과 요사채를 허물고, 옛 법당 터 넓은 부지에 면모를 일신하는 법당과 요사채를 갖추었다. 석불 옆의 용담사 사적비는 전에 있던 위치에 그대로 서 있다.

 

원래의 용담사는 권영하가 1946년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용담사(龍潭寺)’라 한 뒤 사찰의 내력을 적은 사적비(寺蹟碑)를 세웠다. 권영하는 어머니가 1929년부터 이어 온 암자를 물려받아 용담사를 지었다

 

[의의와 평가]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규모의 약사여래입상으로 고려 전기 약사 신앙의 성행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특히 인근에 봉안된 충청남도 공주시 유형문화재 제50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甲寺石造藥師如來立像)과 더불어 충청남도 지역의 흔치 않은 대형 약사여래상이자, 정교한 기법과 예술성을 겸비한 석조여래상이라는 점에서 그 희소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겸비하고 있다. 더불어 시대적으로도 고려 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 중 하나이며, 당시 불상 조성을 주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족의 세력이 강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1년 보물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규모, 기법, 예술성, 역사성 등 여러 측면에서 아산의 대표적 불교 유물이다.

 

▼ 석조약사여래입상 옆으로 사적비가 보이는데, 원래의 용담사를 불상 주위에 지었는데, 그 내용을 담은 사적비로 불상의 건립내용은 없습니다. 불상 주위에 있던 사찰건물은 현재의 위치로 이전 하였습니다.

 

▼ 용담사 사적비는 입자가 큰 화강석 재질의 자연석에 명문을 새긴 비석이다. 높이 100㎝, 너비 60㎝의 자연석 전면 가운데의 높이 74㎝, 너비 28㎝ 정도를 다듬어 비문을 새겼다. 규모가 작고 얼핏 보면 오래된 것처럼 보여서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조성 시기부터 같이 세워져 있던 것으로 추측하기 쉽다.

 

용담사 사적비에는 용담사가 신라 애장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광종 때 혜명조사가 중창하여 1,200년이 되는 사찰이며, 전쟁으로 불타 석불 1기만 남아 있는 곳에 새로 절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내용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애장왕[재위 800~809]과 원효[617~686]는 시기가 다르고 속칭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논산 관촉사를 창건한 혜명대사 관련도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용담사의 내력을 과시하기 위해 원효가 창건했다고 하고, 고려 전기의 석불[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을 구실로 혜명대사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용담사 사적비 이전의 관련 자료는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옛 사찰의 이름도 알 수 없다.

 

1945년 광복 직후 각지의 절터나 석불만 남아 있던 곳을 찾아 절을 짓는 경우가 매우 많았고, 이러한 일은 충청남도 아산시에서도 여러 사례가 확인된다. 용담사 사적비는 조형미가 부족한 자연석 비이고 내용에 오류가 있다. 그러나 1946년에 권영하가 오래된 절터에 용담사라는 지금의 사찰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형태]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커다란 판석 1매를 이용하여 조각한 높이 5.4m의 대형 석불이다. 규모가 크고 다루기 어려운 화강암을 재료로 하였음에도 상호(相好)의 표현이나 불신(佛身)에서 보이는 옷 주름의 굴곡 있는 요철(凹凸), 손과 신체 각 부분까지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수작이다.

 

측면의 두께가 얇으며 정면향을 위주로 한 환조상(丸彫像)이지만 옆면도 조각하여 부조(浮彫)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상호는 옆으로 길게 뻗은 눈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으며, 선각으로 눈두덩과 눈썹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살짝 다문 입술과 오똑한 콧날의 비례도 균형 잡혀 있으며, 양 볼과 턱 부분도 사실적이고 부피감 있게 조각하였다. 양미간에는 동그란 백호(白毫)를 양각하였다. 머리에는 둥근 육계(肉髻)[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를 표현하였으며, 동그란 나발(螺髮)[부처의 머리털]의 표현도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자애로우면서도 당당하고 근엄한 상호는 통일신라시대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불신의 정면향을 위주로 하여 음각과 양각으로 옷 주름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가슴 아래로 U자형을 이루며 떨어지는 옷 주름은 요철이 도드라져 불상에 활력을 주며, 무릎 부근에는 겹고리무늬[동심원문(同心圓文)]의 옷 주름이 있어 특징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형식화된 측면이 강하나, 당당하고 근엄한 불상의 형상을 도드라지게 보여 준다. 양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왼손으로 약합을 들어 올리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에 가깝게 손을 펴서 약합을 받치고 있다.

 

※시무외인이란 부처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위안을 주는 수인(手印)[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으로 오른손 또는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세운 채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모양이다. 약합의 형태는 둥근 합 모양으로 위쪽에 두 줄의 선으로 합의 뚜껑을 표현하였다. 상의 후면은 조각이 생략되어 있으며, 불상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특징]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대표적 약사여래상 중 하나이다. 착의(着衣)는 법의(法衣)가 양어깨를 덮고 길게 내려뜨려진 통견형(通肩形)이며, 하체의 옷 주름이 Y자형으로 갈라져 각각의 다리에서 U자형으로 떨어지는 이른바 우전왕식(優塡王式) 착의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착의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전통적 착의 형식이다.

 

또한 약합의 모양 역시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咸安防禦山磨崖藥師如來三尊立像)과 유사하며,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착의나 지물(持物)[불상의 손에 쥐어져 있는 물건]의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반면 불상이 정면관(正面觀) 위주로 변화하여 부조적 측면이 강조되고, 두께가 얇아지는 것 등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에 가깝다. 또한 옷 주름의 표현 역시 매우 도식화된 측면이 강하며 일종의 장식 문양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조상(造像)의 형식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의 도상적(圖像的) 전통을 계승하나, 양식이나 기법 면에서는 고려시대의 지방적 특징이 진행되는 단계의 불상으로 제작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전기의 약사 신앙은 호국적 성격을 기반으로 하여 수차례의 약사도량(藥師道場)이 세워지는 등 유행하였는데,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청남도 지역 약사 신앙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약사여래입상 주위에 있던 대웅전을 엣날 법당터로 옮긴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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