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평지마을 한가운데에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이 집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은 것이라고 전하나, 바깥사랑채는 건축양식으로 보아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안사랑채가 튼 'ㅁ'자형으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안사랑채의 왼쪽 모서리에 'ㄴ'자형의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는 'ㄴ'자형의 바깥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안채는 부엌이 동쪽에 배치된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바깥사랑채는 높은 누마루집으로 다른 건물과 별도로 담을 돌리고 대문을 내었다. 중문간은 일반적으로 밖에는 대문을 달고 안마당쪽은 개방되어 있는데, 이 집은 양쪽에 모두 대문을 달고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어 특이하다. 행랑채는 안사랑채에 지붕을 아래로 한단 겹치면서 잇대어 짓고 앞쪽으로 솟을대문을 내었다.

행랑채의 서쪽에 있는 부속채는 우리나라 동부지역에만 분포하는 '양통집'이며,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후대에 부분적인 개조가 있었지만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구성을 한 상류주택이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집앞에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주택은 일반 중인들의 주택과는 비교할 정도가 아닌 아주 부자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윤보선(전)대통령은 이 집에서 출생을 하여 10세때 부터는 서울 안국동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윤보선의 해평윤씨 집안은 선대로 부터 만석꾼으로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구한말 정치적으로도 힘깨나 쓰던 집안이었습니다

 

▼ 윤보선(전)대통령은 아산에서 태어난 후 유년기까지만 짬깐 머물다가 서울 공덕동에 아버지가 마련해준 집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자료사진은 공덕동 윤보선가(家)입니다. 

 

▼ 윤보선 (전)대통령이 대한민국 4대 공확국의 대통령으로서 청와대서 자필사인한 문서이며, 청와대를 이승만정권때까지는 경무대라고 했으나, 윤보선 대통령때부터는 청와대라고 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후보로 나선 당시 윤보선후보의 선거벽보 입니다. 윤보선 후보의 약력과 정치이념을 잘 알 수 있는 벽보입니다

 

▼ 하지만 그 당시 박정희 후보는 막강한  중앙정보부를 사조직처럼 부리면서 후보들에 대한 무차별 사찰, 또는 암살위협을 공공연하게 저질렀습니다. 결국은 박정희 후보가 6대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자료사진은 중앙정보부에서 윤보선 후보를 사찰한 보고서이며, 사찰용도는 대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때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이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5.16그때 쿠테타를 진압 할 수 도 있었는데, ...그 학습효과는 전두환의 군사쿠테타로 이어졌습니다.

 

▼ 윤보선(전)대통령의 가계를 알아 보았습니다

윤보선(尹潽善)[1897~1990]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호는 해위(海葦)이다.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이자 1920~1930년대 민족 운동에 참여했던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 의관이었던 이재룡의 장녀 이범숙(李範淑)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안성, 남포군수, 강계부사, 대한제국 육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윤영렬(尹英烈)[1854~1939]이며, 종조할아버지[할아버지의 남자 형제]는 병조판서, 군부대신, 법부대신, 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윤웅렬(尹雄烈)[1840~1911]이다.

 

작은아버지는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尹致暎)[1898~1996]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당숙]인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개화파로 한성부판윤, 독립신문사 사장 등을 지내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_내용은 디지탈아산문화대전,  사진은 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윤보선(전)대통령의 당선과정과 청와대에서의 하야 과정

1960년 3·15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이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내각을 구성하면서 제4대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대통령직을 맡으면서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명칭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었다. 의원내각제에서는 국가 운영의 실권이 국무총리에게 있고, 민주당은 신구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16군사정변을 일으켰는데, 국가 원수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놓지 않았으나 결국 군부와의 갈등으로 1962년 3월 22일 하야를 발표하고 물러났다._내용은 디지탈아산문화대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정책 자문 역할을 하였고, 노태우정권때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는데, 이를 두고 비판이 많았고,  1990년 사망하였습니다.

▼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일대는 해평윤씨의 집성촌으로 여러채의 전통한옥이 있습니다

 

▼ 문간채에 들어서 보는 모습이며, 바깥뜰 정면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행랑채와, 우측으로는 사랑채가 있습니다

 

▼ 문간채의 모습입니다.

 

▼ 문간채에서 보는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만석꾼이 사는 집의 느낌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상상이 안갑니다

 

▼ 바깥뜰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실제로 사랑채의 문은 따로 있습니다.

 

▼ 밖에서 보는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사랑채는 주인 남자가 주로 기거 하면서 손님접대, 또는 손님의 숙식처로 이용되는 별채건물로서, 출입문이 따로 있어야 하는것이 이유 입니다.

 

▼ 사랑채의 전면입니다. 

 

▼ 사랑채의 후면입니다. 밖으로 드나드는 문이 또 있습니다.

 

▼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문인데, 사랑채의 남자 주인은 곧바로 안주인이 있는 안채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 안채의 뒷 모습입니다

 

▼ 안채에서 보는 사랑채 입니다.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은 높지 않게 잘 보이도록 담장을 낮게 쌓았습니다

 

▼ 다시 바깥뜰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행랑채의 모습입니다. 저문을 통해서 안채로 들어 갑니다.

 

▼ 행랑채의 문은 2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 안채가 있는 안뜰의 모습입니다.

 

▼ 밖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 큰 마당을 사이에 두고 윤씨일가의 집들이 모여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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