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는 1706년(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1932년에 중건한 옛 사당 위편에 새로운 현충사를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_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허지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인적이 아주 드물어서 여유롭게 둘러 보았습니다.

 

▼ 현충사 기념관에서 인용한 현충사 경내의 배치도 입니다.

 

▼ 출입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언덕 같은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보입니다. 자세한 것은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여 보시면 좋습니다

 

▼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은 현충사에 다녀온후 마지막으로 들려 보았습니다.

 

▼ 충무문은 현충사 경내의 외삼문으로서 지붕 기와가 청색기와로서 최고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정성을 다한 정려각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정려현판입니다. 충무공 이외의 4분의 현판이 차레대로 걸려 있습니다.

 

▼ 원래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 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에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 , 복원 하였습니다.

 

▼ 정려각 주위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입니다. 경내의 조경은 너무나도 잘 되어 있어서 산책하듯이 둘러 보기에는 너무도 좋은 곳 입니다

 

▼ 이면공(이순신의 3남) 묘소로 가는길에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습니다.

 

▼ 이면공 묘소로 올라근 계단은 가파르게 보입니다.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면, 좌측의 이충무공의 장인,장모 묘소를 먼저 보고 나중에 보셔도 됩니다. 

 

▼ 이순신 장군의 셋째아들인 이면(李葂)은 임진왜란중 고향에서 왜군과 전투중에 전사하였는데, 이순신장군의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상심하였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은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는데, 이회,이열,이면,여식 그리고 서자로 이훈, 이신과 서녀 2명을 두었습니다.

 

그중에서 3명의 아들이 전쟁중에 전사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 3남 이면이 전사하였고, 서자인 이신은 이괄의 난때 전사하였고, 이훈은 1627년 정묘호란때 4촌 이완과 함께 전사 하였다고 합니다. 큰아들 이회는 아버지 이순신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참전하였습니다.

 

▼ 이면공 묘소 앞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입니다.

 

▼ 이면공 묘소 옆으로는 충무공의 장인,장모 묘소가 옆에 있습니다. 

 

▼ 고택으로 가는길에는 두그루의 은행나무가 멋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근 500여년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은행나무 앞에서 보는 활쏘는 사대(射臺)입니다. 이순신장군이 활를 쏘던 곳이라고 합니다.

 

▼ 은행나무 옆으로는 이순신 장군 후손의 묘 4기가 보입니다

 

▼ 은행나무에서 보는 고택입니다

 

▼ 잘 가꾸어진 두그루의 은행나무는 이순신장군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를 지켜 보았고 또한, 남해에서 올라온 장군의 운구행렬을 지켜 보았던  나무입니다

 

▼ 고택의 앞에서 부터 들어가 보는데, 샘이 하나 보입니다

 

▼ 이충무공의 가족과 후손들이 사용하던 우물이며, 아직도 맑은물이 흘러 나옵니다. 뜨거운 날씨에 한모금 마셔본 물맛은 괜찮았습니다.

 

▼ 조선시대 양반가들의 주택의 모습입니다. 이충무공이 전사한 후에도 후손들이 400년을 지키고 있었던 아주 오래된 집니다. 지금은 현충사 관리소에서 관리를 합니다

 

▼ 고택의 내부를 들러보고 현충사로 발길을 옮깁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