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牙山龍華寺石造如來立像)은 대형 석불로 제작 당시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충청남도 지역의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불 중 하나이며, 2013년 2월 12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2013년 2월 12일]

- 도로명주소: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로1138번길 54-13[외암리 372-2]

 

※ 문화재청, 기타 사이트에 적혀 있는 주소를 확인해 봤는데 용화사 근처이기는 하지만, 다음 주소는 틀렸습니다.

- 지번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74는 틀린 주소 입니다

- 지번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75-8번지는 틀린 주소 입니다

※ 여러 문화재의 위치가 많이 틀렸다는것을 이번에 알았는데, 통일된 주소로 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 접근성 : 어려움이 없습니다(아산에도 용화사가 여러곳이 있으니 설화산 용화사로 찾아가야 합니다)

- 주차장 : 소형(3대)

 

-  이하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아산문홛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아산 용화사 입구에는 멋진 소나무가 있습니다. 뿌리는 하나인데, 큰 가지가 두개로 자라서 아름다운 소나무가 되었습니다. 개인집의 담장안에 있는것도 아니고, 공터에 있는데, 고임돌도 받쳐놓고, 버팀쇠도 있는것으로 봐서 자치단체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차는 이 소나무 앞에서 주차를 하면 되고, 승용차 3대 정도의 주차 공간이 있습니다.

 

[건립 경위 및 변천] 용화사(龍華寺)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었고 유일하게 고려시대 석불인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곳이다. 1947년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자리에 월산이 조부의 지원을 받아 용화사를 창건하였다.

 

공덕비에 월산은 비구니라고 하였지만 결혼한 여승이어서 흔히 보살이라 하였다. ‘용화사’라는 절 이름은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이 흔히 미륵불로 불리었기 때문에 미륵신앙에서 제시되는 미륵정토를 용화세계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후 대처승인 법성이 주지를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충청남도 지역에서 다수 제작되었던 대형 석불 입상 중에서도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인근에 있는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과 더불어 고려 전기 아산 지역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는 매우 크다. 아산시의 대표적 불교 유물 중 하나로 소중하게 잘 보전할 필요가 있다.

 

※ 다 좋은데, 어찌 일본전통석등을 새웠는지...꼭 왜놈 석등을 세워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하나의 석재를 이용하여 제작한 높이 2.5m 정도의 대형 석불이다. 무릎 아래는 땅속에 묻혀 있어 확인이 어려우나, 무릎 위부터의 불신(佛身)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낮은 부조(浮彫)의 세부 표현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상호(相好)는 반개한 눈과 낮은 코, 도톰한 입술을 선각과 양각을 이용하여 조화롭게 새겼으며, 양미간 위로는 양각으로 백호(白毫)를 표현하였다. 얼굴에 비하여 크게 조각된 양쪽 귀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선각으로 삼도(三道)[불상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으로,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냄]를 표현하였다.

 

이마 위로는 낮은 육계(肉髻)[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솟아 있으며, 소발(素髮)[민머리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머리 형태]의 여래상이다. 타원형에 가까운 갸름한 상호를 균형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측면에서도 어색하지 않고 입체감을 갖추고 있다.

 

몸체는 선각과 낮은 양각 부조로 표현하였는데, 자연스레 떨어지는 어깨의 곡선이 유려한 인상을 준다. 착의(着衣)는 대의(大衣) 위에 또 하나의 법의(法衣)를 걸쳤으며, 양어깨를 덮고 길게 내려뜨려진 통견형(通肩形) 착의를 하였다.

 

가슴 안쪽으로 사선으로 걸친 내의(內衣)의 주름을 선각으로 표현하였고, 또한 군의(裙衣)[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를 묶은 띠 매듭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옷 주름은 도식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선각이 아닌 요철(凹凸)이 있는 양각과 음각으로 조각하여 입체감이 있다.

 

양손을 가슴 부근에 모으고 있는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결인(結印)[불상이나 보살상이 손가락을 펴거나 구부려서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것]하였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들어 올렸다. 몸체 뒷부분의 옷 주름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대형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모습이 조화롭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느티나무가 우거져서 불상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가 없어서 낙옆이 다 떨어진 때의 자료사진을 참고하였습니다

 

▼ 미륵불이나, 여래입상을 볼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것은 내가 편안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얼굴 모습을 보는것 입니다. 절집안에 인위적으로 채색을 하거나, 금으로 덮어 쒸운 불상이, 보기에 불편하고, 위압감을 느낀다면 안본것만 못하니, 절집이 아닌 동네 어귀에서 길손을 자연스럽게 맞아주는 석불이야 말로 내가 바라던 여행의 맛입니다. 용화사 여래입상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니, 혹시 길손이 맘에 안드시나 해도 오죽이나, 걱정이 많으셨거니 생각 합니다.

 

▼ 불상의 무릎까지 묻혀 있어서 전체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발끝까지도 완전한 모습일꺼라고 믿습니다. 불상이 무릎까지 흙이 덮혀 있는 이유는 점차 토사가 쌓이기도 했겠지만, 불상의 전도를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묻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특징] 아산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입체감 있는 상호 표현과 대조적으로 평면적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듯한 신체의 표현이 특징적이다. 신체의 굴곡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양팔 역시 정면관(正面觀)을 위주로 부조되어 입체감이나 양감을 느끼기 어렵다.

 

이렇게 양감 있는 상호와 도식적이고 평면적인 불신이 결합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기법보다는 고려시대의 불상에 가깝다. 다만 고려 중기 이후에 보이는 선각으로 간략화된 옷 주름 표현과는 달리 비교적 굵은 요철로 옷 주름을 표현하여 불상에 생동감과 사실성을 더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착의에 따른 내의와 띠 매듭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도 특징적이다. 이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계승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할 수 있다.

 

한 손을 결인하고 다른 손을 편 수인(手印)[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은 당시 보급되었던 수인의 하나로, 이것만으로 존명(尊名)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절집에 범종이 없으면 섭섭하죠!!!, 콘크리트로 잘 지어 놓았고, 현대 시대에 궂이 목조건물을 고집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 용화사(설화산)를 창건 하였다는 월산은 비구니라고 하였지만 결혼한 여승이어서 흔히 보살이라 하였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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