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는 조선시대 곡식을 운반하기 전에 쌓아두던 창고의 하나로 ‘공진창(貢津倉)이 처음 명칭이다.

 

성종 9년(1478) 『경국대전』에 의하여 모든 제도가 정비되면서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은 모두 이곳으로 모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창고터 주변에 만든 성지(城地)가 약 680m 정도 남아 있는데, 겨우 터만을 알아 볼 정도이다. 처음에는 창고가 없어 한데 쌓아 두었으나, 중종 18년(1523)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충청도 지방 39개 목·군·현의 조세로 바친 쌀을 모아 두고 배로 수도까지 운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아산 공세곶고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3-1번지에 있다. 국도 39호선[아산로]의 공세교차로에서 서쪽으로 600m 정도의 지점이다.

 

공세곶(貢稅串)은 영인산 북서쪽 산줄기의 입암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신풍산 북쪽에 거북 목처럼 작은 봉우리로 형성된 곶이다.

 

내륙 깊숙이 형성된 아산만의 가장 안쪽에 바다로 돌출되어 있는 수로 교통의 요지로, 서해의 바닷물이 그 좌우까지 들어왔다.

 

공세리 북쪽은 안성천 하구이고, 서쪽 약 4㎞ 지점은 삽교천 하구여서 조선시대에는 흔히 두 하천이 만나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 공세곶의 앞이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전부 논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바다쪽으로 돌출된 지형으로 배가 드나들었던 곳입니다. 즉 공진창을 두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 1631년(인조 9)에는 공진창 창고를 둘러싸는 창성(倉城)을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380척[115.14m], 높이가 5척 5촌[약 1.7m]쯤이었다.

 

공진창에는 세곡미 800석을 적재할수 있는 15척의 조운선과 720여 명의 조군[조졸]이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해운판관[종5품]이 상주하는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로 민간 운송업이 점차 활발해져 수납 지역이 점차 축소되고, 1762년(영조 38) 해운창 제도가 폐지되어 해운판관 대신 충청도사가 조운을 담당하게 되었다.

 

공진창은 인근 여섯 개 고을, 이후 세 개 고을의 조운만 이루어지게 되자 마침내 아산현감이 관리하게 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그나마 조창제가 폐지되어 공진창도 기능을 잃게 되었다.

 

방치되고 있던 공진창 터 일부는 1897년에 공세리성당의 주임신부였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가 매입하여 성당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변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의하면, 공세곶은 1425년(세종 7)부터는 아산현의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조창(漕倉)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그 뒤 1478년(성종 9)에 삽교천 하류에 있던 면천 범근내포의 조창 기능이 공세곶창으로 통합되고 수납 지역이 확대되어 금산을 제외한 지금의 충청남도 전 지역과 경기도 평택, 충청북도 옥천, 청주 등을 포함하여 충청 지역 40개 군현의 세곡을 모아 조운하는 주요 조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창사(倉舍)가 없어 연해안 포구에 노적하였는데, 1523년(중종 18)에 이르러 80여 칸의 창고를 짓고 ‘공진창’이라 일컫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공진창 성벽 앞에는 그동안 공진창을 관리하던 해운판관들의 공덕비들입니다. 공진창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성벽 어래에 모아 놓은 모습입니다.

 

▼ 현감민계???? 어느 현감의 공덕비가 반쯤 묻혀 있군요!!! 공세곶창지의 기능이 점차 줄어 들면서 해운판관들 대신 현감들이 공세곶창지를 관리하게 되었을때의 현감공덕비인것 같습니다.

 

▼ 공세곶창...차리리 공세곶고지 보다는 공세곶창지가 더 나을뻔 했습니다

 

▼ 여러 해운판관들의 공덕비들이 모여 있는데, 미처 공덕비를 만들지 못한 판관들도 많았을 것 입니다

 

[현황] 아산 공세곶고지의 일부는 공세리성당, 일부는 인주농협 창고와 사무실로 이용되고 일부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창성의 흔적으로 남벽 쪽의 길이 10m, 높이 4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남문거리에 여섯 기의 삼도해운판관비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아산만방조제[1974년]와 삽교천방조제[1979년]가 축조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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