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놀이(Namsadang Nori)는 국가무형문화재(제3호)이며, 2009년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남사당(男寺黨) 놀이에 대해서 안성시청의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인용된 설명문과 사진은 안성시청, 국립미속박물관, 문화재청, e-뮤지엄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남사당의 유래(안성시청)

남사당은 조선 후기에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곡예, 춤, 노래를 공연했던 집단으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다.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 때이며,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 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바우덕이 사당을 찾아가는 길은 청룡사 사적비에 우측으로 들어가서 350m쯤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있습니다.

 

※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서 남사당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남사당패는 조선후기 서민층에서 생겨난 민중놀이 집단으로 풍물놀이와 함께 접시 돌리기(버나)·재주넘기(살판)·탈놀이(덧뵈기)·줄타기(어름)·꼭두각시놀음(덜미) 여섯 가지 기예능을 곁들여 공연했던 전문 연희 집단이다.

 

꼭두쇠 아래 4~5명의 뜬쇠, 가열, 삐리(초입자), 저승패와 등짐꾼을 포함해 40~50여 명으로 구성된다. 안성시 서운면 산중에 자리한 청룡사가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안성 남사당패의 기원은 청룡사의 후원을 받은 불당골 사당패로 볼 수 있다.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는 영기와 서낭기, 호적이 편성되고, 풍물잽이는 사물과 벅구 및 무동으로 구성된다. 풍물가락은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힘차고 섬세하며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루 쓴다.

 

판굿의 구성은 인사굿·돌림벅구·겹돌림벅구·당산멀림·벅구놀림(양상치기)·당산놀림벅구(허튼상치기)·당산돌림벅구·오방진·무동놀림·벅구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가새벌림·좌우치기·네줄백이·마당일채(쩍쩍이굿)·밀치기벅구·상쇠놀이 등 개인놀이, 무동 서기(새미 받기)·채상놀이 등으로 구성된다.

20세기 초에 많은 남사당패 모갑이들이 배출되었는데, 안성의 풍물은 ‘웃다리 농악’으로 불리며 경기지역 농악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활약하던 남사당패로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원육덕패, 이원보패 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사당패의 실질적 기원은 ‘바우덕이,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김기복’ 꼭두쇠의 계보로 이어진다.

1982년 이원보패에서 상쇠 수업을 받은 김기복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가 설립되었다.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7년 김기복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지난 2015년 작고했다. 이후 보존회장 겸 전수조교인 성광우를 중심으로 공연활동 및 이 종목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바우덕이 사당의 위치를 지도로 보겠습니다. 사당 밑에 주차장이 보입니다.

 

▼ 바우덕이 사당은 산기슭에 붙어 있으며 대문은 열려 있습니다. 사당은 2005년 9월에 건립되었습니다.

※ 설명에서 흥선대원군이 남사당패에게 옥 관자(玉貫子)를 선물로 주었다는데, 그냥 떠도는 이야기인지, 어느 기록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옥관자라는 것을 찾아보면, 옛날에 양반들이 쓰던 망건(網巾)의 끈을 조일 때 쓰던 단추 같은 모양의 단추를 관자라고 하며, 옥으로 만들면 옥관자라고 합니다.

 

망건의 관자는 일반 양반들은 그냥 흑색의 관자를 망건에 달았으며, 벼슬아치들의 관자는 옥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문양 조각이 없고, 당상관(정 3품 이상)의 관자는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합니다.

자료사진으로 망건과 관자의 모양을 보겠습니다.

 

▼ 망건의 관자들의 종류별 사진입니다. 옥관자는 사진 아래에 있습니다. 같은 옥으로 만든 관자라고 하더라도 문양을 조각했다면 지위가 높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흥선 대원군이 선물로 옥관자를 주었다면 사진  아래쪽 우측의 옥관자일 것입니다

 

▼ 망건은 상투를 튼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머리에 두르는 띠인데, 말꼬리털로 만든다고  합니다. 망건에 옥관자를 매달은 모습입니다. 두 개가 한조(Set)이며, 안내문에서 설명하는 관자가 망건에 매다는 관자인지는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 사당의 문은 잠겨있으며, 우측에는 바우덕이의 동상이 있습니다

 

▼ 사당의 문이 닫혀 있어서 자료사진으로 사당 내부를 보았습니다. _ 지역N문화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바우덕이의 대한 소개를 안성시청 홈페이지(자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안성 유기와 더불어 안성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바로 바우덕이(1848~1870)다.

남사당패의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바우덕이는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라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출중한 기예를 지닌 재주꾼이었다.

 

남사당패는 본래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남사당패에 맡겨진 바우덕이는 이들과함께 생활하며 기예를 익힌다. 타고난 재주로 남사당패 여섯 마당을 모두 익힌 그녀의 특기는 보는 사람을 모두 숨죽이게 하는 줄타기, 어름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두려움의 연속인 줄타기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여자임에도 남사당패로 자라난 바우덕이의삶과 많이 닮아 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줄 위에 올라 자신의 한과 설움을 민중들의 그것과 함께 풀어놓았다.웃음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바우덕이의 몸짓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바우덕이가 줄 위에 서면 일꾼들이 정신을 빼앗겨 빈지게를 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1865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흥선 대원군이 작업에 지친 일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전국의 놀이패를 불러들여서 공연을하게 했는데, 이때 남사당패와 바우덕이의 뛰어난 놀이 실력 때문에 옥관자를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바우덕이는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이제 더 이상 줄 위에 선 바우덕이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가 그 뒤를 이어 놀이판을 벌이고 있다

 

※ 바우덕이의 본 이름에 대한 자료는 김암덕(金巖德)이라는 이름에서 바위 암자에 덕자를 붙여서 바우덕이가 되었다는 설이 정설인 듯합니다.

▣ 바우덕이의 약력(안성시청)

  1. 1848년,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2. 1853년,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당시 5세)
  3.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4. 1863년,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당시 15세) ,당시 꼭두쇠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5.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6.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7.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8. 1865~1870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9. 1870년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 펼침 
  10. 1870년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골짜기에 묻힘

▼ 바우덕이가 1865년에 경복궁 중건작업장에 흥선대원군의 초청을 받아서 공연을 했는데, 바우덕이 공연을 본 인부들이 넋이 나가서 일은 안하고 지게꾼들은 빈 지게만 지고 다니는 바람에 바람에 공사가 잘 안됬다고 합니다.

 

▼ 남사당패의 여러 가지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 안성시청 홈페이지(문화관광)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

남사당은 조선 후기 전문 공연 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연예집단입니다. 현재까지 풍물, 어름 (줄타기), 살판(땅재주), 덧뵈기(탈놀이), 버나(대접 돌리기), 덜미(인형극) 등 6마당과 10여 가지 세부 기예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은 옛 남사당의 근거지였던 안성에서 이를 계승·발전하고자 창단되었습니다.

 

▣ 남사당 유래

남사당패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민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농악놀이, 접시 돌리기, 재주넘기, 줄타기, 탈놀이, 인형극 등 여러 가지 놀이를 제공하던 유랑 예인집단이었다.

 

조선 후기 바우덕이라는 인물은 경기도 안성에 있던 남사당패의 꼭두쇠였다.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꼭두쇠에 올랐으며 천민 신분이면서 정삼품의 벼슬에 올랐던 주인공이었다.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어디를 가나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대접을 받았는데 다른 기예 집단과 대중들은 바우덕이를 예로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 뒤 김복만, 이원보, 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그 맥을 잇고 있다. 처음 이들은 가는 곳마다 절과 관련을 맺고 절 건립의 시주를 맡기도 하고 집결지로 삼기도 했다.

 

▣ 남사당패의 구성(40~50여 명)

 

▶ 꼭두쇠(단장) : 모갑이라고 하며,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지고 있다.

 

▶ 곰뱅이쇠:꼭두쇠보좌, 한 명 또는 두 명, 허가담당, 먹을 것과 지낼 곳 담당

패거리의 이인자로 마을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 그 마을의 양반, 마을의 관력자들에게 허가를 받는 일을 하였고, 보통 한 명이었지만, 패거리 규모에 따라서 두 명이 있기도 했다.

 

▶ 뜬쇠(조장) : 각 연희 분야의 우두머리이다.

 

▶ 가열 : 뜬쇠 밑에서 수련하고 공연하는 사람들로, 기예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라고 한다

 

▶ 삐리(연희자) : 새내기로 가열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가열이 되기까지 여장을 하고, 겨울철에 기예를 배운다

 

▶ 저승패 : 연희 기능을 상실한 늙은 단원으로 패의 고문 역할을 한다.

 

▶ 등짐꾼 : 장비를 운반한다.

 

▣ 남사당 놀이 여섯 마당

※ 사진은 안성시청과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총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놀이는 풍물놀이에 사용되는 악기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며 각각의 놀이판마다 재담, 해학, 익살, 사회 비판의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대중화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1) 풍물 : 풍물은 일종의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로, 풍물악기가 갖는 경쾌한 장단과 몸놀림 그리고 다양한 진법으로 펼쳐지는 총체적 신명놀이이다

 

1-2) 무동놀이 : 어린아이(여장 남자아이)를 어깨 태우며 노는 기예로 1명을 올리는 단무동, 2명을 올리는 3무동, 4명을 올리는 5무동 등을 실현하며, 꼭대기에 오르는 아이를 새미라고 한다

 

1-3) 12발 놀이 : 기다란 종이가 달린 모자를 쓰고 소고를 치며 노는 벅구놀이와 12발(약 14m) 상모놀이.

 

2) 버나(접시 돌리기) :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

둥글고 넓적하게 만든 접시로 긴 막대와 담뱃대, 대접 등을 이용하여 재담과 함께 돌리거나 높이 던지는 놀이

 

3) 살판(땅재주) : 어릿광대와 살판쇠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땅재주를 부리는 놀이이다. 땅재주에는 앞곤두, 뒷곤두, 번개곤두 등이 있다. 살판은 오늘날의 텀블링(재주넘기)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으로 생겼다

 

4) 어름(조선줄타기) : 어름이란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는 뜻으로 줄을 타는 어름산이가 3m 줄 위에서 펼치는 다양한 묘기와 재담을 보여준다

 

5) 덧뵈기(가면극) : 풍자극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풍자극 탈놀이이다. 덧뵈기는 가면극의 우리나라 말이다

 

6) 덜미 :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 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 인형극이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인형의 몸 뒤쪽 덜미를 잡고 움직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 안성 남사당과 관련된 흑백사진을 몇장 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찍은 사진이며, 사진의 내용이 남사당패인지 불분명한 사진도 있습니다(사진들은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이 사진은 석남 송석하 선생이 수집,소장한 남사당패의 사진입니다. 시대는 일제강점기때에도 남사당패의 공연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 이 사진들(3장)은 일제강점기때가 아닌 해방후의 모습인 듯합니다.

 

▼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발행한 엽서들입니다. 남사당패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조선총독부)은 조선의 유형,무형등 모든것에 대한 조사, 촬영을 하면서 많은 유리건판과 사진을 남겨놓았습니다. 어찌보면 귀중한 사진들 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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