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왕비였으며, 승하한 후에 조성한 능도 조선 최초의 능인 정릉(貞陵)의 신덕왕후입니다. 원래는 능이 덕수궁옆의 정동에 있었지만, 태종 이방원과의 악연때문에 성밖인 성북구에 강제로 천장되었던 비운의 왕비릉이었던 정릉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정릉의 상설도 입니다. 재실에 먼저 들려서 천천히 둘러 보았습니다.
▼ 북한산 아래에 있는 서울 정릉입니다
▼ 처음에는 그냥 정릉(貞陵)이라고 하다가 "서울 정릉"이라고 하는데, 조선왕릉에는 정릉이라는 능이 2곳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11대 중종의 능인 강남 삼성동의 정릉(靖陵)이 있습니다.
-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 능의 역사
1396년(태조 5)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하였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이야기
신덕고황후 강씨(재세 : ?년 ~ 1396년 음력 8월 13일)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로 책봉되었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아들(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에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 태조의 가계도를 보면 신의왕후 한씨의 자식들이 이미 장성한 후에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2남1녀중 2남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지정하면서 부터 신덕왕후의 훗날은 결정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1차 왕자의 난때 신덕왕후의 두아들은 죽었습니다. 딸이었던 경순공주는 태조(이성계)가 비구니로 출가 시켰다고 합니다.
▼ 원래의 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 재위 시절에 승하하여 지금의 정동에 묻혔었는데, 태조가 생전에 일러두기를 선덕왕후옆에 묻어 달라고 뜻을 비췄지만, 이방원이가 그렇게 해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구리의 건원릉으로 모시고, 태종(이방원)의 미움을 받았던 신덕왕후들릉은 도성 밖으로 강제 천릉되는 비운의 왕비였습니다만, 태조의 힘만 믿고, 어린아들을 왕세자에 올린것이 사후에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청걔천의 광통교에는 태종(이방원)이 얼마나 신덕왕후를 미워했는지 알 수 있는 석물이 있습니다. 광통교는 원래 나무받침대에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흙다리였는데, 홍수때마다 떠 내려가니까 태종이 신덕왕후의 능에서 봉분을 없애버리고,석물은 허물어서 다리를 만들라고 지시하고, 병풍석은 꺼구로 박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릉의 능침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습니다.
▼ 재실은 다른 왕릉의 재실보다는 규모가 커 보입니다.
▼ 재실에 근무하던 능참봉의 직위는 낮아 보이지만, 왕릉을 관리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는 자리였는데, 참봉직급 시험에서 합격한 자들중에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능참봉에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하위직인 능참봉이지만 왕릉에 오는 고위직들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지라 능력이 보이는자는 승진이 빨리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한명회가 능참봉 출신이었습니다.
▼ 재실 앞마당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 재실에 들어가면 담장처럼 있는 행랑채를 보게 됩니다. 주로 하인들이 거주하거나, 비품을 저장하는 곳간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행랑채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문이 또 있습니다.
▼ 능참봉이 업무를 보던 재실이며, 재실에는 향을 보관하던 향청도 있었습니다.
▼ 제기를 보관하던 제기고입니다
▼ 재실을 빠져나는 문을 나섭니다.
▼ 능이 하나 있는 단릉이어서 둘러보는 길을 단순합니다.
▼ 금천교를 건너서 신들의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 홍살문앞에 왔습니다. 잔디는 능의 관계된 최소한의 부분만 남겨놓고 마사토를 깔아놓았습니다.
▼ 향로와 신로는 정자각앞에서 꺽입니다.
▼ 정자각옆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만, 다른 왕릉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 원래 능을 조성 할때 부터 좁았는지 협소해 보이는 정릉입니다.
▼ 멀리서 당겨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장명등인데, 키는 낮아 보이고, 두꺼워 보입니다.
▼ 능침에는 올라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료사진을 꾸며서 올려보았습니다. 봉분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민묘형태 입니다. 태종 이방원이 난간석과 병풍석을 허물어서 청계천 광통교를 만드는데 써 버렸습니다.
▼ 수복방과 비각의 뒷쪽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정자각의 운계와 동계의 모습입니다.
▼ 운계의 소맷돌에는 구름모양의 문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분간이 안됩니다.
▼ 정릉의 수복방과 비각입니다.
▼ 제사음식을 진설하는 탁자의 색갈을 보면 다른 왕릉과 틀립니다. 원래는 붉은색이었으나, 고종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나라가 되면서 고종이 직계왕들5분(나중에 3분추가하여 총 8분)의 묘호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금색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묘호가 황제로 추존된 황제들을 알아보겠습니다
1) 태조는 태조고황제
2) 장조는 장조의황제
3) 진종은 진종소황제
4) 정조는 정조선황제
5) 순조는 순조숙황제
6) 익종은 문조익황제
7) 현종은 헌종성황제
8) 철종은 철종장황제
▼ 수라간입니다.
▼ 소전대 입니다. 흔하게 보이는 석물이 아닙니다.
▼ 정자각의 정전에서 능침으로 연결되는 신로입니다.
▼ 정자각의 월대에서 서계로 내려와 홍살문을 나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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