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혜릉(惠陵)입니다. 혜릉은 제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의 능으로 단릉입니다. 혜릉의 특징은 혼유석 앞에 장명등이 없습니다. 아마도 분실된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구리 동구릉의 배치도에서 혜릉의 위치를 표시하였습니다
▼ 혜릉의 앞에 왔는데 홍살문에서 부터 어수선 합니다. 공사중으로 자재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습니다.
- 능의 구성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 능의 역사
1718년(숙종 44)에 단의왕후 심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되어,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하였다
-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야기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재세 : 1686년 음력 5월 21일 ~ 1718년 음력 2월 7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 능주인 단의왕후는 경종의 원비였습니다. 원비 단의왕후나, 계비인 선의왕후도 후손이 없었습니다.
▼ 홍살문 바로 옆 왼쪽에 판석이 만들어져 있는데, 배위도 아니고, 어정을 덮어 놓은것인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 수복방은 복원된지가 얼마 않되어 보입니다.
▼ 수라간은 복원공사가 마무리 되는듯 합니다.
▼ 정자각의 이런저런 사진입니다.
▼ 능침에는 올라가서 못보니.자료사진들을 올려봅니다.
▼ 능은 병풍석이 없는 표준왕릉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장명등이 안보입니다.
▼ 단릉의 비각이라서 그런지 작아 보입니다.
▼ 단의왕후 혜릉의 표석과 비문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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