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석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를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高宗) 20년(1883)에 세운 북묘(北廟)에 있던 것이다.

 

북묘는 서울 명륜동 흥덕골에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비석은 4년 후인 고종 24년(1887)에 세웠다. 비문은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우게 된 내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은 고종 임금이 직접 짓고, 글씨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_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우측 끝의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는 북묘비 입니다, 불교 미술품과는 거리가 있지만 역사자료의 가치로 소장하고 있는 듯 합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북묘의 본당이며, 좌측에 등롱대가 보입니다_이하 자료사진은 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북묘의 외부에 있는 등롱대석 입니다

 

▼ 북묘의 내부에 있는 등롱대석 입니다

 

▼ 등롱이며, 보통 대나무로 만든 틀에 창호지를 붙이고 내부에 촛불 등을 넣어서 불을 밝히는 등기구이며, 초롱이라고도 합니다_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북묘 관제상과 사장군이라는 사진 제목이 있는 자료사진인데, 북묘의 내부로 보입니다.

 

▼ 북묘의 본당 내부에서 보는 비각이며, 비각 내부에 비석이 보입니다.

 

▼ 중국의 관우를 위한 사당을 짓고, 그 내력을 비에 새겨 남겨 놓았다는데, 뭐,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것은 어쩔 수 가 없습니다.

 

글씨는 민영환이 썼는데, 글씨체가 참 깨끗하고 올바르게 보입니다.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1905.11.30)로서 불의에 항거하신 분 입니다.

 

▼ 뒷면의 모습입니다.

 

▼ 참고로 자료에 따르면 관우의 사당은 서울에 5곳이 있었습니다.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었으나, 지금은 동작구에 이전 되었으며, 남관왕묘라고 재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방에는 전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세운 관왕묘가 있었으며,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사당은 여러곳에 있다고 합니다.


북묘외에 서울에 5곳, 지방에 4곳의 관왕묘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즉 관우의 사당이 9곳이 였습니다. 북묘는 조선 고종의 뜻에 따라서 지어졌지만, 동묘는 명나라의 뜻에 따라서 선조32년(1599)에 세워졌습니다.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의 자료사진입니다._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현재의 동묘의 모습입니다.(2015년)_자료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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