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이 있던 개성 현화사는 고려 제8대왕 현종(玄宗, 재위 1009~1031년)이 재위 11년차인 1020년에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으며, 현화사 초대 주지로 삼각산(현재 북한산)의 삼천사(三川寺)의 주지였던 법경(法鏡)을 임명하여, 칠층석탑을 만들어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이때 석등도 만들어진 것으로 전합니다.

 

□ 소재지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박물관앞)

□ 출토지 : 경기개성 현화사터

□ 분   류 : 비지정 문화재

□ 시   대 : 고려(1020년)


▼ 현화사지 석등은 일반 석등과는 구조 자체가 너무 달라서, 마치 승탑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석공의 파격적인 솜씨가 매우 빛나는 석등입니다

 

▼ 고려 현종(8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 이라고 하는 현화사에 대한 간략한 안내문 입니다. 고려 현종(재위 22년 : 1009~1031)은 8대 왕이며, 현종9년에 거란의 3차 침입때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고, 재위기간중 고려왕조의 기틀을 굳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 왕이며, 왕에 즉위하기 전 에는 승려였습니다.

 

▼ 다음은 현화사지 석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 입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고려의 왕실 사찰인 현화사의 명성을 짐작케 하듯, 석등의 규모는 크고 당당하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은 네 개의 기둥돌로 구성하여 사방이 트여 있으며, 듬직한 지붕돌 위에는 불꽃 모양의 보주 장식이 돋보인다.

 

현화사 석등은 논산 관촉사, 금강산 묘길상 마애불 앞의 석등 등과 함께 고려 석등 가운데 수준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석등 앞에 함께 배치한 배례석(拜禮石)은 영주 부석사 등에서 보듯이 석등 앞에 공양이나 예배를 드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석등과 함께 배치되던 시설이라는 의미를 살려 현화사 석등 앞에 전시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이 석등을 구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박물관 이전과 함께 자리를 옮겼으며, 2005년 10월 28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이후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전체적인 상태 보강과 각 부재의 강화처리 및 취약부의 보존수복을 위해 2017년 9월에 해체하여 이후 3D스캔 촬영 및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2018년 11월 6일부터 2019년 5월 20일까지, 보존과학부에서 진행한 현화사 석등 보존처리가 완료되어 2019년 10월 17일 원래 위치인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설치 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때 찍은 현화사터의 사진이며, 칠층석탑, 당간지주등은 보이는데, 석등의 자료사진은 없습니다. 칠층석탑과 현화사비, 당간지주는 현재 북한에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 현화사비라는 자료사진 입니다. 고려 현종 12년(1021)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비문에는 현종이 부모인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연기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비는 법회를 열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칠층석탑의 모습은 흑백사진이지만, 매우 아름답습니다.

 

▼ 초층탑신에 새겨진 석가모니불은 마치 불화를 보는듯 생생 합니다.

 

▼ 현화사지 석등 앞에 놓여 있는 배례석입니다. 아마도 경복궁에 있을때의 사진인 듯 싶습니다.


▼ 구조 자체가 매우 특이하게 생긴 현화사지 석등은 크기도 남다르며, 화사석의 4면은 개방형으로 트여 있습니다. 옥개석(지붕돌) 네 귀퉁에는 풍탁을 달던 구멍이 보이고, 보주까지 이어지는 상륜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 석등의 네면은 동일한 모양이어서 어디서 봐도 똑 같은 모양 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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