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포진은 서해로부터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項)에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군사의 요충지로, 창설 시기는 임진왜란의 체험을 겪은 조선 선조때로 추정됩니다.

 

그후 영조36년(1760)에는 덕포진에 종 3품의 수군첨사가 수군 316명을 지휘하였으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격전을 치루었던 곳이며, 1980년에 발견되어 1981년 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습니다.

 

발굴 당시 탄약고 및 포대에 불씨를 공급하기 위한 불씨 보관 장소 파수청지가 발굴되었고 소포, 중포, 포탄 및 상평통보가 출토되었습니다. 당시 6문의 포가 발견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육군군사박물관,덕포진 전시관(1문)등에 보관중입니다.

 

▼ 안내지도를 보면 주차장이 있는데, 꼭 차가 있어야만 가 볼 수있는 것이 아니라 대명항에서도 해안길을 따라서 올 수 도 있습니다.

 

▼ 덕포진전시관에 꼭 들려가시기 바랍니다. 덕포진이 1980년에 발견되어 1981년부터 발굴작업에 관게된 사진들과 덕포진포대와 강화포대가 포격전을 벌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덕포진전시관 내부입니다.

 

▼ 덕포진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 포에 대한 설명인데, 강화도 초지돈대에 있는 대포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하며, 초지돈대와 덕진진의 남장포대 가면 홍이포(모조품)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홍이포는 인조때 청나라에서 들여왔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때 포격전을 하던 포였다고 하며, 사거리는 1.5~2km정도였으나, 포탄이 터지지 않는 그냥 쇳덩어리라서 위력은 없었습니다. 조선말기때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포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덕포진에서 쓰던 포는 중포와 소포가 있었는데, 소포와 중포는 크기만 다를뿐 모양은 똑 같이 생겼습니다.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포는 중포입니다

 

▼ 청동동치13년5월명중포는 포신에 새겨진 명문인듯 하며, 포구경이 123mm나 되는 중포입니다. 동치(治)13년은 중국 청나라의 제10대 황제인 목종() 동치제()의  재위[1861~1875] 때의 연호이며. 1862년부터 1874년까지 13년 동안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동치제의 생모는 서태후입니다. 동치13년은 1874년이고, 조선 고종11년의 해가 됩니다. 조선은 고종34년 드디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독립된 연호 광무(光武)라고 하였습니다. 순종때의 연호는 융희(隆熙)였으며, 융희4년만에 조선은 일제에 병합되었습니다.

 

▼ 덕포진포대에서 발굴된 실물인 청동동치13년5월명중포입니다.

 

▼ 강화해협을 지키던 포대는 전부 3개 포대였으며, 포좌는 15개였습니다

 

▼ 덕포진은 수군이 관리하였으며, 덕포진 수군 첨절제사의 임명을 교지로 지시하였는데, 그 원본인듯 합니다. 첨절제사는 절제사의 아랫벼슬로 병영()의 병마첨절제사, 수영()의 수군첨절제사로 구분되는데, 전문 무관입니다

 

▼ 덕포진포대에서 강화해협을 따라서 배치된 포대의 대략적인 모습입니다.

 

▼ 강화해협에 나타난 적국의 함대와 포격전을 하는 모습인듯 합니다. 사진상으로 보면 강화해협 건너는 덕진진 남장포대입니다

 

▼ 현재의 파수청의 건물은 없고, 파수청 터만 있습니다. 파수청 건물은 몇년 후 에 다시 지어질 것 으로 보입니다

 

▼ 손돌목은 지금도 물살이 쎄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한 지역입니다.

 

▼ 덕포진포대를 직접 돌아보겠습니다.

 

▼ 가포대의 모습입니다만, 포좌지붕이 볏짚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옛날에도 저랬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합니다

 

▼ 포를 운현궁에서 만들었다면 ...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이 태어난 대원군의 사가입니다. 대원군의 집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만들었던 포가 덕진진에 배치되었습니다.

 

▼ 포좌를 들여다 보는데, 너무 좁고, 포구도 너무 낮은데 어떻게 포를 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가 무척 무겁기 때문에 포를 바퀴달린 포가에 얹었는데, 지금의 상태는 포를 그냥 바닥에 놓고 쐈다는 것인데, 좀 이해 안갑니다

 

▼ 참고로 육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중포를 포가에 얹은 모습입니다

 

▼ 강화해협에서 볼 때는 포대가 잘 안보이게 포 구멍만 뚫어 놓았습니다.

 

▼ 가포대를 뒤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가포대에서 강화해협 건너의 덕진진과 남장포대, 덕진돈대를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덕포진포대에서 덕진진 남장포대까지 거리는 대략 820m의 거리입니다.

 

▼ 이번에는 나포대를 보겠습니다. 나포대 뒤로는 논이 있는데, 아마도 포대를 만들때 해안선에 흙을 쌓고 포대를 만든 것 처럼 보입니다

 

▼ 가포대와 나포대의 포대모양은 구분이 안됩니다.

 

▼ 나포대에서는 중포와 소포가 발굴되었습니다. 사진상으로 보면 중포와 소포의 크기는 구분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 포좌의 내부 모습인데, 포좌 가운데 커다란 돌이 보이는데, 포의 반동을 줄이는 돌인듯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포구가 너무 낮습니다. 포수가 조준을 했다면 땅에 바짝 누워서 조준했다는 것 인데, 불가능한 이야기 일 것 입니다

 

▼ 포구의 방향이 초지진을 향해 있습니다

 

▼ 포대를 둥굴게 배치해서 화력이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 해안에 흙을 쌓아 높게 포대를 만들었습니다

 

▼ 다음은 다포대 인데, 포좌 지붕이 기와입니다.

 

▼ 다포대는 포구가 광성보 방향입니다

 

▼ 다포대는 포가 3문입니다. 포는 중포 1문이 고정식 포가에 얹힌 상태로 발굴되었습니다.

 

▼ 다모대의 포좌입니다. 지붕만 기와이고, 나머지는 가포대,나포대와 동일합니다

 

▼ 다포대도 해안에 흙을 쌓고 포대를 배치한 모습입니다

 

▼ 다음은 포사청 터의 모습입니다.

 

▼ 손돌묘 부근에서 바라보는 파수청터의 모습입니다

 

▼ 손돌묘와 돈대터가 남아 있는 곳의 모습입니다.

 

▼ 손돌묘에서 바라보는 맞은편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의 모습이며, 가운데 물이 흐르는 곳이 손돌목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손돌목돈대는 신미양요때 미군 육전대와 조선군 어재연장군 휘하 병사들이 마지막까지 백병전을 벌였지만, 결국은 대부분 전사하고, 수자기도 빼앗긴 전투가 있었던 곳 입니다

 

▼ 현재 돈대터는 군사초소가 있어서 안내표지판으로 대신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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