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 장군이 대승을 이룬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곳입니다. 현재 성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의 성곽과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행주산성의 참고자료는 고양시 행주산성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행주산성 정상부의 자료사진입니다.
▼ 행주산성의 관리소로 보이는 건물입니다.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행주산성의 여러 건물들이 표시된 그림지도 입니다.
▼ 대첩문은 1970년 건립하였으며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높이 4.7m의 평삼문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지붕 안쪽에 홍살문을 넣어 행주대첩지의 숭고한 뜻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문은 평소에는 오른쪽 출입문 하나만 열려 있으나 행주대첩제 등 주요행사 때는 모두 열어 사당이나 서원의 삼문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 권율장군 동상은 ‘충장공 권율 도원수’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1986년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김세중 조각가가 제작하였습니다. 동상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4점의 부조물은 권율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을 이루어낸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항전모습입니다. 동상의 높이는 4.5m, 기단 3.5m로 총 8m에 달합니다.
- 임진왜란 판도를 바꾼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고양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조선침략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음은 행주에서 벌어진 총 7차전에 걸친 전투 내용을 자료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제1차 공격
제일 먼저 제1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총부대를 앞세웠다. 그의 군사는 평양성 싸움에서 패배한 여파로 벽제관전투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 싸움을 설욕의 기회로 삼아 기세등등하게 선봉에 나선 것이었다.
조선군은 적이 성책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화차, 수차석포, 총통, 각궁을 일제히 발사하였다. 예기치 못하고 집중공격을 당한 왜군의 말들이 놀라 날뛰었고 말에서 떨어진 왜군은 혼비백산 하여 거의 궤멸상태가 되어 물러났다.
제2차 공격
다음은 제2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비롯한 3봉행과 더불어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가 진두에서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화차로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좌우상하로 자유롭게 조준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수적으로 유리한 왜군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적장이 흉부에 관통상을 입고 달아나자 제1대보다 빨리 무너졌으며 희생자도 많았다.
제3차 공격
왜군들은 쉬지 않고 다시 공격하였다. 제3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방어막인 성책을 부수기 위해 누대를 설치하고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배치하여 성을 향하여 공격했다. 주위에 나머지 군사들은 접근시키지 않게 하는 등 신중한 작전을 펼쳤다.
이때 조경은 지자포를 쏘아 이를 무너트리고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계속된 공격으로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못하여 주저하며 게걸음 작전으로 옆으로 피하는 일본군에게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로 공격하였다. 큰소리를 내며 터지는 비격진천뢰의 공격으로 왜군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일시에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계속된 공격에도 왜군은 성을 점령하기는커녕 제1성책도 돌파하지 못했다.
제4차 공격
보다 못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직접 선두에 나와 제4대 장병들을 지휘했다. 총대장이 선봉으로 나서자 왜병들도 사기가 높아져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해왔다. 마침내 성 깊숙이 침입하였다.
우키다의 독전으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돌진하여 산성의 제1성책이 무너지는 위기가 닥쳤다.
그러자 부장 토가와 다찌야스(戶川達安)는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선군들이 동요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권율 장군은 도망하는 군사 한 명을 잡아 참수하고 직접 선두에 나서자 조선군은 다시 사기가 오르면서 혈전에 임하였다.
이에 총대장 우키다는 조선군 총통의 집중 사격에 부상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싸우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을 입어 후퇴하였으며 결사대이던 제4대대도 참패했다.
제5차 공격
이번에는 제5대장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의 공격이었다.
왜군들은 전세가 불리해짐을 알고 방어막인 성책을 불태우기 위해 갈대를 묶어 바람 부는 방향으로 불을 붙여 제2성책의 일부에 불이 붙었다.
조선군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리 준비한 방화수로 불을 끈 후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돌을 퍼부었다.
말을 탄 채로 후퇴하던 키카와 역시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제6차 공격
이어 제6대장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는 전략을 바꿔서 지형적으로 가장 약한 지역인 산성의 서북쪽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격을 가하였다. 그곳은 임전자세와 단결력이 뛰어난 승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때 승장 처영은 서북쪽 자성에서 1,000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적들이 근접하면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자 마침내 적은 물러갔다.
제7차 공격
제7대장 고바야카(小早秀包)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선두에 섰다.
승병이 지키고 있는 제5차, 제6차 집중공격으로 약해진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해서 그곳의 일부분을 뚫고 내성까지 돌입하였다.
이때 승병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지휘소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권율 장군이 대검을 빼어들고 총공격을 외치자 승군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분전하였다.
옆 진영의 조선군도 왜군을 향해 궁시를 집중 발사하며 처절한 근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조선군 진영에 화살이 떨어져 투석전을 펼쳤다. 화살이 떨어진 것을 안 왜군은 기세를 올리며 집중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부녀자들도 치마를 잘라 허리에 묶고 돌을 담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다. 산성의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마침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수사 이빈이 한강으로 수만 개의 화살을 가득 실은 배 2척을 몰고 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창의사 김천일도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후방을 지원했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도 들어와서 양천 포구를 뒤덮었다.
이에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 적을 완전히 격퇴시킬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까지 12시간 동안의 분전이었다.
왜군은 일곱 차례의 공격과 퇴각을 되풀이하였고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성을 지켜냈다.
왜군은 해가 저물면서 전력도 약해지고 조선군의 기습도 두려워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한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서 키카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4명의 장수가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조선군은 시체 130급(級)을 수습하였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기치와 갑주, 창검, 병장기 등 727건의 군기물을 습득하였다.
▼ 1986년 건립하였으며 2층 누각으로 팔짝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입니다. 옛날의 주무기인 각 궁의 연습도장으로 심신을 단련하며 호국의식을 함양하는 국궁 장입니다. 행주대첩제 때에는 국궁 대회가 열리며, 봄, 가을 주말에는 국궁 체험장을 별도로 운영하여 일반관람객에게도 국궁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충장사로 가는길에 홍살문을 지나갑니다.
▼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0년 건립하였습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입니다. 매년 임진왜란 행주대첩일인 3월 14일에는 고양시에서 주최하는 행주대첩 제전행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권율 장군 사당은 이전 1842년 조선 헌종 때 현재의 행주서원 자리에 지은 ‘기공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란 등으로 무너져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행주산성 정화사업으로 행주산성 내에 새로이 ‘충장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건립하였고 이후 기공사도 예전 자리에 복원하였습니다.
▼ 충장사의 전사청은 1987년 건립하였으며, 충장사 제례봉행 때 필요한 제례용품들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 충장사 왼쪽에는 망료위라는 석물이 보이는데, 망료위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후 축문을 태우는 곳입니다.
▼ 대첨기념관은 행주대첩 기념관으로 행주대첩 당시 무기고와 군량창고로 추측되는 자리에 1980년 건립하였습니다. 전시물은 화차인 신기전을 비롯하여 각궁, 총통 등 무기류와 권율 장군 승전도 3점, 토성에서 출토된 와당 및 토기 파편 등의 유물, 그밖에 조선시대 장군과 나졸 형상과 대첩비문 액자 및 병풍, 망암 변이중 선생 문집 등이 있습니다.
▼ 대첩기념관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료 리플릿을 스캔한 자료를 올립니다
▼ 대첩기념관을 나와서 덕양산 정상부 방향으로 가면서 방화대교의 모습을 담아봅니다. 방화대교는 고양시에서 김포공항, 인천공항으로 가는 인천곡제공항고속도로입니다
▼ 행주산성이 있는 산은 덕양산(124.6m)이라고 합니다. 대첨기념관에서 조금 올라오다 보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진강정을 먼저 들렸다가 갑니다.
▼ 진강정은 1970년 건립한 사각지붕, 건평 36㎡의 정자입니다. 호젓한 위치에 있어 행주산성에서 한강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정자 이름은 한강의 홍수를 막는다는 의미로 진강(鎭江)입니다. 한글 현판으로 서희환 선생의 휘호입니다.
특히 이곳은 2013년부터 행주나루터와 연결된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이 지나는 곳으로 누리길을 걷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 행주대첩초건비가 보관되어 있는 비각과 행주대첩비의 모습입니다. 정상에 서있는 15.2m의 행주대첩비는 1970년 건립한 것으로 탑신의 글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아래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썼습니다. 이 비는 1963년 경기도민과 가계유지들에 의하여 세워진 기념비로 1970년대 국토정화사업의 일환이었던 행주산성보수정화사업에 의하여 새롭게 보수, 재건되었습니다.
▼ 행주대첩초건비에서 바라보는 덕양정의 모습입니다.덕양정은 1970년 건립한 팔작지붕, 건평44㎡의 정자입니다. 덕양산의 이름을 딴 정자로 오르막길을 올라오다 땀을 식히기에 좋은 곳입니다. 사방이 트여있는 전망은 주변 환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의 옆구리를 지나는 자유로의 모습입니다.
▼ 행주대첩 초건비입니다.행주대첩 초건비는 1602년 건립한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의 크기는 178㎝, 너비 80㎝, 두께 18㎝의 대리석 재질입니다. 권율 장군이 돌아가신 후 행주대첩의 승전을 되살리고자 장군의 휘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이 비의 앞면 글을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머리글은 김상용이 썼습니다. 행주산성에 있는 유일한 문화재입니다. 비문이 많이 지워졋는데, 오랜세월 비바람에 비문이 지워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비문을 일부러 돌로 문질러서 지웠을 가능성도 있을것 같습니다
▼ 북한산을 행주산성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충위정은 행주산성 영상교육관으로 호국정신을 계승, 함양을 위하여 1978년 지어졌으며, 십자형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입니다. 이곳에서는 17분 분량의 영상자료 <행주대첩과 권율장군>을 상시 상영하고 있습니다. 충의정 주변은 심학산, 장항습지, 북한산, 창릉천, 능곡평야 등을 볼 수 있는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 충의정 앞의 전망 좋은 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신행주대교입니다.
▼ 충의정 건물 뒷쪽으로 토성으로 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토성은 흙으로 쌓은 퇴뫼식 토축성으로 덕양산 7~8부 능선에 쌓았습니다. 1992년 415m를 복원하였으며 총길이는 1㎞입니다. 토성에서는 삼국시대 와당 및 토기 파편들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새지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 행주산성의 북쪽으로 낮은 지대에 성문지가 나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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