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릉(孝陵)은 고양시 서삼릉에 있으며, 조선12대 인종과 인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쌍릉입니다. 인종은 조선국왕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간 이었습니다.

 

아버지인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9개월만에 세상을 떠난 왕이었는데, 원래 몸이 허약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성왕후는 인성왕후는 10세에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 왔으며, 인종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6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효릉(서삼릉)에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자료사진으로만 알아보았습니다. 보러 오는사람이 없기 때문에 정자각의 정전은 문이 닫혀 있습니다.

 

 

- 능의 구성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인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1578년(선조 11)에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병풍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인성왕후의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 능의 역사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 정릉(靖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인성왕후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이후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78년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 인종(仁宗) 이야기

인종(재세 : 1515년 음력 2월 25일 ~ 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544년 음력 11월 20일 ~ 1545년 음력 7월 1일)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1515년(중종 10)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악화되어 1545년(인종 1)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성왕후(仁聖王后) 이야기

인성왕후 박씨(재세 : 1514년 음력 10월 1일 ~ 1577년 음력 11월 29일)는 본관이 반남인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1514년(중종 9)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인종은 30세에 조선 12대 국왕으로 등극해서 고작 8개월만에 승하하신 임금입니다. 인종은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산후증으로 7일만에 사망하여, 어린나이때 부터 계모인 문정왕후의 아래에서 자랐으나, 문정왕후의 기질이 고약하여, 항상 시달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종은 아들이 없었으며, 승하하고 나서 배다른 동생인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습니다.


 

▼ 효릉은 현재 사유지인 농협중앙회의 소유로 되어 있어서 특별하게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 효릉은 비공개 지역에 있습니다. 어쩌다가 왕릉지역이 농협의 소유가 됬는지 모르겠습니다.

 

▼ 효릉은 현재 개방이 안된 왕릉입니다. 그래서 자료사진으로만 알아봐야 합니다. 사진으로 보면 인종릉만 병풍석이 되어 있고, 인성왕후릉은 난간석만 되어 있습니다. 

 

인종이 먼저 승하 한 후에 인성왕후릉도 미리 만들어 놓았지만, 인성왕후릉은 병풍석을 두루지 않았다고 합니다.

 

▼ 자료 사진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홍살문안으로 보이는 정자각과 바닥의 향로와 어로의 모습입니다만, 길이 아주 좁아 보입니다.

 

▼ 펜스 안으로 보이는 배위의 모습입니다(자료사진입니다)

 

▼ 수복방인지, 수라간인지 모르지만, 터만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정면에서 보는 정자각의 모습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정자각의 뒷쪽에서 보는 모습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정자각의 여러가지 모습의 사진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보통 보는 왕릉의 예감과는 다르게 판석이 보입니다만, 무엇에 쓰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왼쪽은 왕릉의 사초지 오른쪽 아래에 있는 산신상석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효릉에 잠들어 계시는 인종과, 인성왕후를 받는 신하들의 문석인과, 무석인의 모습입니다. 보통 왕릉은 동쪽과 서쪽에 문신석과 무신석이 한쌍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물론 석마도 각각 한마리씩 배당이 되어 있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왕릉의 좌/우로 하나씩의 망주석이 세워져 있으며 혼유석 앞에는 장명등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문양이 아주 아름답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효릉의 인종(왼쪽)과 인성왕후(오른쪽)의 쌍릉 모습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인종의 릉은 화려하게 병풍석으로 둘렀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인성왕후의 능은 인종의 릉과 다르게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둘렀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인성왕후의 혼유석(상석)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왕릉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입니다. 모두 곡장을 향해서 나쁜 귀신들이 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보통 릉의 동쪽과 서쪽으로 석양과 석호가 각각 2마리씩 세워져 있습니다. 석양의 모습만 비교하여 올렸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릉을 지키는 석호의 모습은 유난히 관심이 가는데, 얼굴 모습이 아주 재미 있습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석호의 앞 모습만 보여주는 자료사진인데, 하나도 안 무섭고, 친근하고 우수꽝스러운 모습에 재미있게 보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효릉의 비긱과 표석 자료사진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의 자료사진입니다.(자료사진 입니다)

 

 

묘표 - 음기(번역) : 조선국 인종대왕 효릉 인성왕후부좌
인종 영정 헌문 의무 장숙 흠효 대왕은 정덕 10년인 을해년(중종10, 1515) 2월 25일에 탄생하였다. 경진년(중종15, 1520)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가정 23년인 갑진년(중종39, 1544) 11월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을사년(인종1, 1545) 7월 1일에 승하하여 10월 15일에 고양 희릉의 서쪽 능선 간좌(북동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다. 재위가 8개월이고 향년은 31세이며 명나라에서 ‘영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 효순 공의 인성왕후 박씨는 정덕 9년인 갑술년(중종9, 1514) 10월 1일에 탄생하였다. 가정 6년인 정해년(중종22, 1527)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갑진년(인종즉위, 1544)에 왕비로 봉작이 올랐다. 만력 5년인 정축년(선조10, 1577) 11월 29일에 승하하여 무인년(1578) 2월 15일에 인종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64세이다.
숭정 기원후 126년(영조29, 1753)에 세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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