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서삼릉에는 왕릉외에도,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인조의 손자인 경선군,경완군의 묘, 태조의 손녀 경혜옹주의묘, 왕자와 공주의 묘, 후궁의 묘와 태실등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들어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료사진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서삼릉에 있는 비공개 지역의 원,묘등을 알아 보았습니다.

 

▼ 회묘(懷墓)의 자료사진 입니다.회묘(懷墓)제10대 연산군 사친 폐비 윤씨 묘입니다.


- 회묘의 조성1482년(성종 13), 1497년(연산 3), 1504년(연산 10), 1969년

- 회묘의 구성

회묘는 조선 9대 성종의 폐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 윤씨의 묘이다. 회묘는 연산군 즉위 후 1504년(연산 10)에 회릉(懷陵)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형식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맞게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 회묘의 역사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가 사사되자 처음에는 일반묘로 조성하고, 1489년(성종 20)에 성종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연산군은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1497년(연산 3)에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던 묘소를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하고 묘호를 회묘(懷墓)라 하였다.

 

이후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존하여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 능호를 회릉(懷陵)이라 하고 상설을 왕릉의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을 다시 회묘로 격하하였으며, 1969년에 묘소를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 폐비 윤씨(廢妃 尹氏) 이야기

폐비 윤씨(재세 : 1455년 음력 윤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본관이 함안인 함안부원군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신씨의 딸로 1455년(단종 3)에 태어났다. 1473년(성종 4)에 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었다가, 이듬해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성종 7)에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 다른 후궁들을 투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1477년(성종 8)에는 중궁전에 비상(砒霜)과 주술서책이 발견되어 원자(연산군)와 성종에게 해가 끼칠 위험성이 있다 하여 폐위 될 뻔 하였으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후 1479년(성종 10)에 투기의 죄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성종과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위되었다.

 

여기에 성종의 두 후궁 엄씨와 정씨의 모함이 더해져 1482년(성종 13)에 사사되었다. 성종은 연산군을 생각하여 1489년(성종 20)에 ‘윤씨지묘’라는 묘비와 2명의 묘지기를 두게 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誌文)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허락하였으며,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라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모든 칭호가 삭탈되었다.

 

 

▼ 고양 서삼릉 안에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왕릉 외에는 원과, 묘가 많이 있는데, 이번에는 제16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昭慶園), 소현세자빈 강혜민 민씨의 영회원(광명시), 소현세자의 아들의 묘를 알아 보았습니다.

 

먼저 인조의 가계도에서 인열왕후 한씨의 첫째아들 소현세자의 가계를 올렸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정에서 금기시 하는 친청배명 소신에 따라서 인조와 불편한 관계였으며, 급기야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며느리 강혜빈 민씨를 사사하였으며, 손자셋을 전부 제주도로 귀양 보내 둘을 병사하게 만들었는데,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이면서 조선은 또 한번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 먼저 소현세자의 소경원을 자료사진으로 알아보았습니다

 

▼ 자료사진을 보면 안타깝게도 사초지가 푹 꺼져 있고, 정자각은 불타버려 월대만 남았습니다

- 소경원의 구성

소경원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의 원이다. 서삼릉 경역에 있는 3기의 원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이 있고 향로와 어로는 묻혀있다. 정자각은 명확하게 터만 남아 있으며 예감과 산신석이 정자각터 뒤에 있다. 원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으며,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호 1쌍, 석양 1쌍을 배치하였다.

- 소경원의 역사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 한 후 두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고양 효릉(孝陵) 근처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하였다.

- 소현세자(昭顯世子) 이야기

소현세자(재세 : 1612년 음력 1월 4일 ~ 1645년 음력 4월 26일)는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첫째 아들로 1612년(광해 4)에 회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1625년(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인조 7) 정묘호란 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듬해에 부인 강씨와 동생 봉림대군(효종)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심양에 머무는 동안 단순한 볼모가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를 비롯한 반청(反淸)파 대신들은 친정(親淸)적인 인물로 보여 왕세자로는 부적격자로 보이기도 하였다.

 

9년 후인 1645년(인조 23)에 볼모생활을 접고 귀국하였으나 반청친명정책으로 인해 박대를 받았다. 귀국 한지 2달 후에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어 4일 만에 급사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의 아홉 구멍(九血)에서 출혈되고 있고, 시신의 낯빛이 진흑으로 변해있었다고 하여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양 서오릉에는 없지만 소현세자와 부부지간인 민혜빈 강씨가 잠들어 있는 영회원永懷園(경기도 광명)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 영회원의 구성

영회원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원이다. 폐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친정집안에 묘를 조성하였다가, 1718년(숙종 44)에 복위되어 묘를 새롭게 조성하였다. 원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호 1쌍, 석양 1쌍을 배치하였으며, 홍살문, 정자각, 곡장 등은 소실되었다.

- 영회원의 역사

1646년(인조 24)에 소현세자빈 강씨가 폐위되어 사사된 후 친정인 금천 강씨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19년(숙종 44)에 복위되어 시호를 민회빈(愍懷嬪), 묘호를 민회묘(愍懷墓)라 하고 세자빈묘의 형식에 맞게 묘를 새롭게 조성하였다.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영회원(永懷園)으로 격상하였다.

-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이야기

민회빈 강씨(재세 : 1611년 ~ 1646년 음력 3월 15일)는 본관이 금천인 우의정 강석기와 고령 신씨의 딸로 1611년(광해 3)에 태어났다. 1627년(인조 5)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볼모로 가게 되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도와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 무역과 농장 경영을 하여 볼모자가 아닌 여성 경영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두 달 후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 맞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강씨가 왕실을 저주하였다고 모함하면서, 1646년(인조 24)에 폐위되어 사사되었다. 사사 후 소현세자의 아들 3명이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첫째 아들 경선군과 둘째 아들 경완군은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셋째 아들 경안군만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이 후 효종대에부터 무고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무산되었다가, 1718년(숙종 44)에 무혐의가 인정되어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되었다.

 

 

▼ 자료사진으로 민혜빈 강씨가 잠들어 있는 있는 영회원의 봉분 주위의 모습을 알아 보았습니다. 잔디에 흙이 파먹은 자리는 두더쥐가 들쑤셔 놓은 자국입니다. 왕릉 잔디관리에 최대의 적은 두더쥐입니다.

 

 

 

▼ 제16대 인조 손자 경선군(慶善君;석철)과 경완군(慶完君;석린)의 묘입니다. 즉 인조의 원자 소현세자의 아들의 묘입니다. 소현세자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이 경안군(慶安君;석견)입니다.

 

인조가 3명의 손자를 제주도에 유배시켜 경선군,경완군이 현지에서 죽고, 막내인 경안군만 살아 남아 나중에 복권되었습니다. 묘지석이 있는 묘가 경선군묘입니다.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이럴때 쓰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묘의 구성

경선군 · 경완군묘는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아들 소현세자의 장남인 경선군과 차남인 경완군의 묘이다. 묘소에는 문석인과 상석을 배치하였다. 쌍분의 형식으로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경선군, 오른쪽이 경완군의 묘이다. 경선군묘 앞에는 ‘경선군지묘’ 라 써있는 비석이 있다.

- 묘의 역사

1648년(인조 26)에 경선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13세로 세상을 떠나자 소현세자의 소경원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다. 같은해에 경완군 역시 제주도 유배지에서 9세로 세상을 떠나자 경선군묘 옆에 묘를 조성하였다.

경선군(慶善君) 이야기

경선군(재세 : 1636년 음력 3월 25일 ~ 1648년 음력 9월 18일)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첫째 아들로 1636년(인조 14)에 원손(元孫)으로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의 요청으로 심양에 볼모로 잠깐가기도 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아버지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1646년(인조 24)에 어머니 민회빈 강씨가 폐위되어 사사되면서, 1647년(인조 25)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1659년(효종 10)에 경선군(慶善君)으로 추증되었다.

- 경완군(慶完君) 이야기

경완군(재세 : 1640년 ~ 1648년 음력 12월 23일)은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둘째 아들로 1640년(인조 18)에 태어났다. 1647년(인조 25) 형 경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72년(고종 9)에 경완군(慶完君)으로 추증되었다.

 

 

▼ 제1대 태조 손녀 경혜옹주(敬惠翁主) · 이숙무묘(李叔畝墓)경혜옹주의 묘입니다. 경혜옹주는 태조 이성계의 첫째아들 이방우의 딸이며, 이숙무는 경혜옹주의 남편입니다. 어찌해서 이방의 딸과 사위의 묘가 서삼릉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료사진으로 보는 묘는 방자형이고, 문석인은 뒷머리가 없는것 처럼 보입니다.

 

진안대군 이방우는 고려의 관리였으며, 아버지 이성계와는 달리 고려를 뒤집는 역성혁명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사망하였으며, 나중에 진안대군에 추봉되었습니다.

- 묘의 구성

경혜옹주 · 이숙무묘는 조선 1대 태조의 첫째아들 진안대군의 딸인 경혜옹주와 이숙무의 묘이다. 묘소는 쌍분의 형태로 조성하여 문석인, 상석, 표석 등을 배치하였다. 봉분은 고려 말 조선 전기의 형식인 사각분으로 둘레돌을 세워 조성하였다.

- 경혜옹주(敬惠翁主) 이야기

경혜옹주(재세 : ? ~ 1458)는 태조의 첫째 아들 진안대군 이방우와 삼한국대부인 지씨의 딸로 태어난 년도는 미상이다. 처음 종친의 딸로 1413년(태종 13)에 옹주(翁主)로 봉해졌다가, 1440년(세종 22)에 칭호를 바꾸어 영동현주(永同縣主)로 고쳤다. 이숙무 사이에서 2남(이원증, 이형증) 4녀를 낳았으며, 1458년(세조 4)에 세상을 떠났다.

- 이숙무(李叔畝) 이야기

이숙무(재세 : ? ~ 1439년)는 본관이 한산인 이종학의 아들로 목은 이색의 손자이다. 처음 경혜옹주와 혼인을 하여 대호군(大護君)을 거쳐, 1418년(세종 즉위)에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후 공안부 윤(恭安府 尹), 동지총제, 각 도 관찰사, 형조판서를 거쳐 1437년(세종 19)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439년(세종 21)에 떠났으며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 왕자 왕녀의 묘입니다.왕자·왕녀 묘역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과 황제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4기 등 총 22기의 묘를 일제강점기에 옮겨온 곳입니다.

 

각 묘에는 옮겨진 후 새로 세운 묘비석과 원래 묘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묘는 모두 하나의 담장 안에 있으며, 묘역 앞에는 문석인과 상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참고로 서삼릉의 왕자,왕녀의 묘역에 있는 묘주들의 현황을 정리해보았습니다(태실병장은 묘주와 태실이 같이 묻힘)

 

▼ 숙의묘역입니다. 숙의 묘역은 조선시대 국왕의 후궁의 묘 5기를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옮겨온 곳입니다. 각 묘에는 상석과 묘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일부 묘표석 뒷면에는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 하나의 곡장 안에 있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숙의 묘역에는 특이하게 완화군의 묘가 있습니다

 

고종 왕자 완화군(완친왕)묘입니다. 완화군은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 사이의 아들입니다.



- 묘의 형식과 구성
완화군(완친왕)묘는 후궁 묘역 안에 위치해 있다. 완화군묘는 처음 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조성하였으나 광복 후 도시화 개발로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묘에는 상석과 향로석, 묘표석만 있다. 묘표석에는 ‘有明朝鮮國 王子領宗正卿府事完和君 贈諡孝憲公墓(유명조선국 왕자영종정경부사완화군 증시효헌공묘)’라고 새겨져 있다.
 
- 완화군(완친왕) 이야기

완화군(재세 : 1868년 음력 윤4월 10일 ~ 1880년 음력 1월 12일)은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로 1868년(고종 5)에 태어났다. 고종에게는 첫째 아들이 된다. 1876년(고종 13)에 완화군에 봉해졌으나, 1880년(고종 17)년에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907년(융희 1)에 완친왕(完親王)에 추봉되었다.

 

 

▼ 빈,귀인 묘역입니다.빈,귀인 묘역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과 황제의 후궁의 묘 16기를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옮겨온 곳입니다. 각 묘에는 상석과 묘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모두 하나의 곡장 안에 있슺니다. 나머지 석물들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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