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예릉(睿陵)은 강화도령 조선 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아직 수라간과 수복방은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서삼릉에서 예릉의 위치를 표시한 그림입니다.
▼ 예릉(睿陵)의 상설그림을 참고그림과 편집해 보았습니다. 다른능과 다른것은 장명등이 다른 석물보다 앞으로 나와 있는것 입니다
▼ 하늘에서 보는 예릉의 모습입니다. 특이한 것은, 보통은 장명등이 혼유석 앞에 있는데, 예릉은 무석인 보다 앞에 있습니다.
▼ 조선25대 국왕 철종의 예릉은 조선왕릉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입니다.
- 예릉의 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예릉의 역사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 철종도 한창때에 등극하였으나, 왕위를 이을 자손이 없이 3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래 휘(이름)는 이원범이었으나, 외자의 이름을 갖는 풍습으로 이변으로 개명하였습니다.
▼ 금천교를 건너서 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 홍살문 앞에서 보면 향로와 어로외에 변로가 있습니다. 수라간과 수복방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 정자각의 여러 모습을 담아서 올렸습니다
▼ 예감앞에 평석이 보이는데, 다른 능과는 다른 모습니다. 산신상석은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 능침을 좀더 가까지 보려면 전망대로 가야 하는데, 가는길에 능을 조성할때 버린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드러나 있습니다. 원래 이 예릉의 자리는 원래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었던 자리였는데, 정릉(靖陵)이 천릉하고 난후에 버렸던 석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예릉의 능침을 당겨 보았습니다
▼ 예릉(睿陵) 자료사진을 모아서 능침의 이런저런 모습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 가운데의 장명등과 양쪽의 망주석의 자료사진인데, 석공의 솜씨가 예사 솜씨가 아닙니다
▼ 다시 정자각의 서계를 보면 어로와 변로가 나란히 있습니다.
▼ 운계의 문양이 구름문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운계는 꽃 문양도 가끔 있습니다
▼ 배례청의 제상의 색갈을 보면 금색입니다. 금색은 황제의 색입니다.
▼ 비각의 모습입니다.
▼ 철종의 표석이 조선국왕일떼의 표석은 없고 대한제국 황제의 표석만 있는데, 순종때에 표석이 만들어진듯 합니다.
묘표 - 음기(번역) : 대한 철종장황제 예릉 철인장황후부좌
철종 희륜 정극 수덕 순성 흠명 광도 돈원 창화 문현 무성 헌인 영효 장황제는 순조년간 신묘년(순조31, 1831) 6월 17일에 탄생하였다. 기유년(헌종15, 1849) 6월 8일에 덕완군으로 봉해지고, 9일에 즉위하였다.
계해년(철종14, 1863) 12월 8일에 승하하였으니, 재위가 14년이고 향년은 33세이다. 갑자년(고종1, 1864) 4월 7일에 고양 희릉의 오른쪽 능선 자좌(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융희 2년인 무신년(순종1, 1908) 7월에 ‘장황제’로 추존하였다.
황후 명순 휘성 정원 수녕 경헌 장목 철인장황후 김씨는 헌종년간 정유년(헌종3, 1837) 3월 23일에 탄생하였다. 신해년(철종2, 1851)에 왕비로 책봉되고, 계해년(고종즉위, 1863)에 태황제(고종)가 왕위를 이어받자 대비로 올랐다.
무인년(고종15, 1878) 5월 12일에 승하하니, 향년은 42세이다. 이해 9월 18일에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장사지냈고, 융희 2년인 무신년(순종1, 1908) 7월에 ‘장황후’로 추존하였다.
융희 2년(순종1, 1908) ?월 ?일
▼ 수복방터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끝으로 홍살문을 나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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