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제200호인 「고양 서삼릉(西三陵)」은 중종의 계비이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의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3릉(희릉, 효릉, 예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의소세손의 의령원(懿寧園)과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이 서삼릉에 옮겨와 있습니다. 또한 서삼릉 비공개지역에는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후 연산군 사친 폐비윤씨의 회묘(懷墓) 등 왕의 후궁들과 자녀들의 묘, 그리고 태실이 옮겨와 있습니다.
<<< 자료는 문화재청 조선왕릉과 조선왕릉 디지털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서삼릉의 효릉(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은 비공개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삼릉중에서 희릉과 예릉만 볼 수 있습니다.
▼ 서삼릉은 농협종마원,경마교육원등과 골프장으로 둘러싸인 답답한 모습입니다.
▼ 안내 리플릿 자료인데, 비공개 지역이 있습니다. 효릉(인종)과, 소경원(소현새자), 후궁과 왕자들의 묘가 모여 있는 곳은 비공개 지역입니다.
▼ 관람이 되는 곳의 지도그림입니다. 재실은 현재 관리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삼릉 앞에 완릉문화관이나, 관리소를 따로 만들려고 해도, 매표소 주위의 땅이 농협땅이라서 현재는 불가능 할 것으로 보입니다.
▼ 서삼릉이 고양시에 있어서 고양 서삼릉이라고 합니다. 원래의 왕릉과 원, 묘, 태실들이 모여 있는곳 입니다. 이렇게 묘가 많이 모여 있게된 것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때 옮겨온 것 입니다.
▼ 관리소로 사용되고 있는 재실의 일부 건물입니다. 재실은 현재의 건물만 남고, 거의 멸실된것으로 보입니다.
▼ 효창원과 의령원의 입구에는 금천교가 남아 있고, 홍살문이나, 참도는 안 보입니다.정자각 대신 일자각이 보입니다.
▼ 일자각과 표석이 보이는데, 효창원(문효세자_정조의 큰아들)의 표석입니다
▼ 효창원(문효세자)의 표석인데 비문은 정조가 지었다고 합니다.
▼ 정자각의 뒤를 보면 신로가 두개가 보입니다.
▼ 두개의 신로가 보이는데 하나는 효창원, 하나는 의령원으로 통하는 신로인것으로 보입니다.
▼ 일자각의 내부를 보았는데,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례에 필요한 집기들의 창고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배럐청의 내부를 공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예감의 모습도 보입니다.
▼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 봉분이 두개가 보이는데, 앞의 봉분이 효창원(문효세자)이며, 가려서 안보이는 뒷쪽이 의령원입니다.
- 효창원의 구성
효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원이다. 효창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자의 묘제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비각,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신도비는 입구에 세웠다.
- 효창원의 역사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율목동(栗木洞)(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의 이름은 효창묘(孝昌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하였다. 이후 1944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문효세자(文孝世子) 이야기
문효세자(재세 :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났다.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홍역이 발병하여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시호는 온효(溫孝)라 하였다가, 최종으로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 효창원의 문효세자가 누구인가 알려면 정조의 가계도를 봐야 합니다. 정조는 정비 효의왕후 김씨에게서 후손이 없었고, 후궁이었던 의빈성씨의 아들이 문효세자였습니다.
의빈성씨는 원래 영조때 어린 나이로 혜경궁(정조모친)의 궁인으로 궁에 들어 왔으며 정조의 후궁이 아니었으나, 정조가 세자시절부터 의빈성씨에게 여러번 졸라서 후궁으로 들였습니다.
그러나 의빈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는 5살에 그만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의 무너져 내리는 마음이 느껴지는듯 합니다. 의빈성씨의 묘는 서삼릉 후궁묘역에 있습니다.
▼ 효창원(문효세자)의 모습입니다.
▼ 세자의 원(園)이라서 무석인은 빠졌습니다.
▼ 원(園)의 문석인이라서 그런지 몸체가 너무 빈약합니다
▼ 다음은 의령원(의소세손)의 모습입니다. 역시 세자의 원으로서 무석인,난간석은 없습니다. 물론 비각도 없이 표석만 세워져 있습니다.
- 의령원의 구성
의령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원이다. 의령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손의 묘소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표석,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9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 의령원의 역사
1752년(영조 28)에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의 이름은 의소묘(懿昭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하였다. 이 후 1949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야기
의소세손(재세 : 1750년 음력 8월 27일 ~ 1752년 음력 3월 4일)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첫째 아들로 1750년(영조 26)에 태어났다. 1751년(영조 27)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령원의 의소세손이 누구인가 알려면 사도세자(장조의황제)의 가계도를 봐야 합니다.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이었지만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왕족이나, 평민이나, 어린나이의 아기들이 많이 죽어 나갔습니다.
▼ 조선의소세손지묘개봉의령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조가 표석 뒤에 있는 비문을 직접 지었다는데 들어 갈수가 없어서 볼 수 없었습니다. 영조는 의소세손이 죽었을때, 무척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비문까지 지을정도면, 할애비의 손자 사랑이 어땧는지 할 수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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